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예를 들 수 없을 만큼 많이 봐 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물론, 숨은 인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인재는 평소 발굴되고 양성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루아침에 인물이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으랴? 절대 급조 할 수 없는 일이다.
엄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도 난제다. 일거수일투족이 검증대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보사회는 과거 소소한 말까지도 검토대상이다. 보다 자유롭게 살아온 일반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검증 없이 쉽게 불러들인다는 것은 정치인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 아닐까? 능력의 고저를 떠나 그리 쉽게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인가? 정치인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숨에 될 일도 아니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가 안연을 앞에 두고 "쓰일 때에는 나가서 자신이 믿는 바를 행하고, 멈추면 조용히 숨어 지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할 수 있다.(用之則行 舍之則藏 唯我與爾有是夫)" 한다.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 용사행장(用舍行藏)이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 물론, 공자가 원한 것은 벼슬이 아니라 자신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부른다고 나아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가 되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한 일하고 싶은 것이 누구나 갖는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자리를 탐할 것이 아니라 일을 먼저 보아야 한다. 즐거운 일, 자신의 철학과 능력에 부합되는 일이면 기꺼이 응하는 것이다. 한가지,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음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논어 태백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며, 어지러운 나라에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출사하고, 도가 없으면 은둔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빈천한 것이 수치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부귀한 것이 수치다.(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세상이 자신의 도와 일치하는가?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시각이 모두 제각각이다. 따라서 판단도 다르다. 어느 한쪽의 잘못이기 보다 서로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의가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는 데 어찌 하랴? 받아주지 않는 데 어쩌랴? 그를 알아보는 혜안이 필요할 뿐, 선택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다.
덤이지만, 중요한 말이다. 올바른 나라에서 어렵게 사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요, 그릇된 나라에서 부유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다.
모두 알지 않는가? 인사는 중차대한 일이다. 아무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함부로 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요, 무책임은 사악함이다. 최악의 불경(不敬)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 ~ 1584, 학자, 문신)가 쓴 <격몽요결> 제3장에는 몸을 보전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500여 년 전임에도 정보화시대에 버금가는 도덕성을 강조하였다.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고 어떤 일이든 공경하라. 두 구절은 일생동안 사용해도 다함이 없으니, 눈에 잘 띄는 벽에 걸어놓고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思無邪 毋不敬 只此二句 一生受用 不盡 當揭諸壁上 須臾不可忘也)" '사무사 무불경(思無邪 毋不敬)', 일반 가정집에도 많이 걸려있는 글이다.
상호 존중하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다. 스스로는 나아갈 때와 멈출 때,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 누군가 늘 자신을 들춰보고 있음도 깨달아야 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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