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녹번동 주유소 골목에는

  • 오피니언
  • 여론광장

[기고] 녹번동 주유소 골목에는

이현경 / 시인

  • 승인 2021-12-09 11:06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이현경 시인
12월의 창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한다.

고요한 밤, 차 한잔을 마시며 멀거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눈이 갑자기 내린다. 순간 쏟아지는 하얀 눈에 아버지의 환영이 보인다 . 눈을 하얗게 머리에 이고서 두 소나무에 새끼줄을 묶어 그네를 만들어주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물을 버리고 뒤를 돌아보면 금방 살얼음이 되어버렸다. 변변한 놀이가 없었던 그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그네는 참 신났다. 동생과 서로 먼저 타겠다고 싸우다가 아버지에게 혼난 적도 있지만, 우리는 온통 눈으로 덮인 먼 산의 풍경을 보며 즐겁게 그네를 탔었다. 어느 날은 나와 동생이 심심해하는 것을 보시고 다른 집 아이들처럼 썰매를 만들어주셨다. 엄동설한에도 추운 줄도 모르고 해가 질 때까지 언덕에서 썰매를 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어 반들반들한 길을 엉거주춤 내려오면서 길을 미끄럽게 해놔서 금방 넘어지게 생겼다면서 잔뜩 혼을 내고 가셨다. 잠깐 썰매 타는 것이 중단되었지만 사람이 지나가지 않으면 다시 이때다 싶어 달려가 신나게 놀던 일이 생각난다.

문득 코스모스를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우리 집 돌담을 끼고 버려진 돌무더기 땅에 풀을 뽑고 돌을 골라버리고 그곳에 코스모스 씨를 잔뜩 뿌리셨다. 그 뒤로 해마다 가을이 오면 여기저기 피어나는 코스모스를 보며 흐뭇해하시던 아버지와 내가 색색의 꽃잎을 따서 친구들의 머리에 예쁘게 꽂아주고 좋아라 웃던 동심의 추억이 생각난다.



"아버지, 저기 나는 새처럼 저도 하늘을 날고 싶어요."

"그래? 우리 딸 소원인데 까짓것 아버지가 들어주마."

아버지는 어느새 방패연을 가지고 오셔서 하늘을 맘껏 날아보라며 얼레와 연을 주셨다. 내가 주춤하는 것을 보시더니 나의 작은 손을 아버지 손등에 얹고 연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와 공중의 연이 긴 길이에도 교감을 했다. 높이 떠 창공을 흔드는 연 꼬리가 어둠 속에 오버랩되어 나의 마음을 한없이 흔든다.

종종 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퇴근할 시간에 맞춰 동네 언덕배기에 쪼그려 앉아 아버지를 기다렸다. 해가 뉘엿뉘엿 어둠을 재촉할 때, 녹번동 주유소 돌아 골목길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기라도 하면 우리는 벌떡 일어나 내리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우리 아버지가 오신다" 하고 한달음에 뛰어가 안기면, 한 잔을 하셨는지 노을처럼 붉은 얼굴을 하시고 반색을 하셨다.

"이게 누구야. 우리 자식들이네."

아버지는 세상을 다 얻은 듯 우리를 품에 꼬옥 안아주셨다.

"기특하다. 내 새끼들. 아침에 봤는데 그새 내가 보고 싶었구나. 아버지가 맛난 것 사줄게. 어서 가자."

사실 우리는 아버지가 사주는 과자를 먹고 싶어서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시고 그저 행복해하셨다.

양쪽 손에 우리들의 손을 잡고 구멍가게에 들어가 아줌마에게 자랑하시던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다.

어둠의 진공 속으로 눈이 세차게 내린다.

오늘따라 내게 온 그리움의 길이가 너무 길어 바람의 길에서 끊어진 연처럼 지도 없는 먼 밤을 떠돌고 있다.

이현경 / 시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신탄진동 고깃집에서 화재… 인명피해 없어(영상포함)
  2. 대전 재개발조합서 뇌물혐의 조합장과 시공사 임원 구속
  3. 금산 무예인들, '2024 인삼의 날' 태권도와 함께 세계로!
  4. 학하초 확장이전 설계마치고 착공 왜 못하나… 대전시-교육청-시행자 간 이견
  5.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1. [사진뉴스] 한밭사랑봉사단, 중증장애인·독거노인 초청 가을 나들이
  2. [WHY이슈현장] 존폐 위기 자율방범대…대전 청년 대원 늘리기 나섰다
  3.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4. [사설] '용산초 가해 학부모' 기소가 뜻하는 것
  5. 충청권 소방거점 '119복합타운' 본격 활동 시작

헤드라인 뉴스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119복합타운’ 청양에 준공… 충청 소방거점 역할 기대감

충청권 소방 거점 역할을 하게 될 '119복합타운'이 본격 가동을 시작한다. 충남소방본부는 24일 김태흠 지사와 김돈곤 청양군수, 주민 등 9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19복합타운 준공식을 개최했다. 119복합타운은 도 소방본부 산하 소방 기관 이전 및 시설 보강 필요성과 집중화를 통한 시너지를 위해 도비 582억 원 등 총 810억 원을 투입해 건립했다. 위치는 청양군 비봉면 록평리 일원이며, 부지 면적은 38만 8789㎡이다. 건축물은 화재·구조·구급 훈련센터, 생활관 등 10개, 시설물은 3개로, 연면적은 1만 7042㎡이다..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 사립대 총장 성추행 의혹에 노조 사퇴 촉구…대학 측 "사실 무근"

대전의 한 사립대학 총장이 여교수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경찰이 수사에 나선 가운데, 대학노조가 총장과 이사장의 사퇴를 촉구했다. 대학 측은 성추행은 사실무근이라며 피해 교수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전국교수노동조합 A 대학 지회는 24일 학내에서 대학 총장 B 씨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성추행 피해를 주장하는 여교수 C 씨도 함께 현장에 나왔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C 씨는 노조원의 말을 빌려 당시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C 씨와 노조에 따르면, 비정년 트랙 신임 여교수인 C 씨는..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르포] 전국 최초 20대 자율방범대 위촉… 첫 순찰 현장을 따라가보니

"20대 신규 대원들 환영합니다." 23일 오후 5시 대전병무청 2층. 전국 최초 20대 위주의 자율방범대가 출범하는 위촉식 현장을 찾았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원한 신입 대원들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첫인사를 건넸다. 첫 순찰을 앞둔 신입 대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맞은 편에는 오랜만에 젊은 대원을 맞이해 조금은 어색해하는 듯한 문화1동 자율방범대원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민 서대전지구대장은 위촉식 축사를 통해 "주민 참여 치안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자율방범대는 시민들이 안전을 체감하도록..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장애인 구직 행렬 장애인 구직 행렬

  •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내일은 독도의 날…‘자랑스런 우리 땅’

  •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놀면서 배우는 건강체험

  •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 추위…내일 아침 올가을 ‘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