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
아레시보를 뛰어넘어 2016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파 망원경으로 등극한 곳이 지름 500m짜리 중국의 텐옌(天眼)이다. 중국은 과학기술에서도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곳곳에 거대 과학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아레시보가 무너지자 중국에서는 곧바로 갈 곳을 잃은 세계의 천문학자에게 자기네 시설을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과학 대중화 활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미국의 과학이 쇠락하는 징조라면서 앞으로 외계인이 인류와 교신하려면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배워야 할 것이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과학에서 아레시보와 같은 '도구'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므로 여러 가지 현상을 측정하고 관찰할 도구 없이 진보를 이루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펜과 종이만 사용해 상대성 이론에 도달한 것은 분명히 인간 지성의 위대한 승리이지만, 알고 보면 이것도 그 전에 마이컬슨과 몰리라는 두 과학자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사용한 도구에는 마이컬슨 간섭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정도의 크기였다. 이로부터 백 년의 세월이 흘러, 인류는 아인슈타인이 예측했던 중력파를 최초로 검출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마이컬슨 간섭계를 발전시킨 라이고(LIGO)라는 대형 과학시설로 한쪽 길이만 4km에 달한다.
라이고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리고 과학 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험실 수준의 작은 장비도 여전히 새로운 발견을 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 나라의 경제력만 뒷받침된다면 남들이 갖지 못한 거대한 시설을 건설하여 멀찍이 앞서 나간다. 이런 시설은 해외의 뛰어난 과학자를 유치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그래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과학자의 국적보다는 시설에 투자하는 나라에 문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했다.
최근 들어 미국이 누려왔던 과학기술 초강대국의 지위가 흔들리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을 필두로 경제적으로 성장한 아시아권과 여러 나라가 뭉친 유럽이 과학시설 건설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세계를 보는 현미경이라고 할 수 있는 둘레 27km의 강입자가속기(LHC)는 스위스-프랑스 국경에 있고, 백만 톤의 초순수를 사용하여 우주의 비밀을 밝힐 세계 최대의 뉴트리노 검출기는 일본에 지어지고 있다. 미국 과학계가 느끼고 있는 긴장감은 얼마 전 공개된 '에너지 분야 기초 연구에 미국은 경쟁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 제목의 정부 자문 보고서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양자물질 등 여러 전략 분야에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어느 나라의 시설이 우위에 있는지도 분석하고 있다. 아직은 미국 시설의 비중이 높아 보이지만, 국가 경쟁력을 위해 시설에 투자하라는 것이 보고서의 첫 번째 결론이었다.
미국, 중국처럼 큰 나라도 아니고, 유럽처럼 이웃과 왕래가 쉽지 않은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건설에서 폐쇄까지 과학시설의 전주기를 국가 전략으로 다뤄야 한다. 적어도 컨트롤 타워 없이 개별적, 산발적으로 추진하던 시설 건설을 지양해야 한다. 중이온가속기의 쓰라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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