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칼럼] 대형 과학시설과 문명의 미래

  • 오피니언
  • 사이언스칼럼

[사이언스칼럼] 대형 과학시설과 문명의 미래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 승인 2021-12-09 10:52
  • 임효인 기자임효인 기자
박승일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 있는 아레시보 망원경은 반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전파 망원경이었다. 이 망원경은 1973년 외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송신한 것으로 유명하며, 여러 영화에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1995년에 나온 007시리즈 골든아이에 등장하는 망원경 위에서의 격투 장면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 12월 이 아레시보 망원경이 문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케이블이 끊어지고 거대한 장비가 반사 접시에 추락했다.

아레시보를 뛰어넘어 2016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파 망원경으로 등극한 곳이 지름 500m짜리 중국의 텐옌(天眼)이다. 중국은 과학기술에서도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곳곳에 거대 과학시설을 건설하고 있다. 아레시보가 무너지자 중국에서는 곧바로 갈 곳을 잃은 세계의 천문학자에게 자기네 시설을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두고 과학 대중화 활동으로 유명한 미국의 천문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미국의 과학이 쇠락하는 징조라면서 앞으로 외계인이 인류와 교신하려면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배워야 할 것이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과학에서 아레시보와 같은 '도구'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므로 여러 가지 현상을 측정하고 관찰할 도구 없이 진보를 이루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펜과 종이만 사용해 상대성 이론에 도달한 것은 분명히 인간 지성의 위대한 승리이지만, 알고 보면 이것도 그 전에 마이컬슨과 몰리라는 두 과학자가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것을 관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사용한 도구에는 마이컬슨 간섭계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정도의 크기였다. 이로부터 백 년의 세월이 흘러, 인류는 아인슈타인이 예측했던 중력파를 최초로 검출했다. 이를 가능케 했던 것은 마이컬슨 간섭계를 발전시킨 라이고(LIGO)라는 대형 과학시설로 한쪽 길이만 4km에 달한다.

라이고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인류의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리고 과학 하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험실 수준의 작은 장비도 여전히 새로운 발견을 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 나라의 경제력만 뒷받침된다면 남들이 갖지 못한 거대한 시설을 건설하여 멀찍이 앞서 나간다. 이런 시설은 해외의 뛰어난 과학자를 유치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그래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과학자의 국적보다는 시설에 투자하는 나라에 문명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했다.



최근 들어 미국이 누려왔던 과학기술 초강대국의 지위가 흔들리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을 필두로 경제적으로 성장한 아시아권과 여러 나라가 뭉친 유럽이 과학시설 건설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세계를 보는 현미경이라고 할 수 있는 둘레 27km의 강입자가속기(LHC)는 스위스-프랑스 국경에 있고, 백만 톤의 초순수를 사용하여 우주의 비밀을 밝힐 세계 최대의 뉴트리노 검출기는 일본에 지어지고 있다. 미국 과학계가 느끼고 있는 긴장감은 얼마 전 공개된 '에너지 분야 기초 연구에 미국은 경쟁할 수 있는가?'라는 도발적 제목의 정부 자문 보고서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양자물질 등 여러 전략 분야에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어느 나라의 시설이 우위에 있는지도 분석하고 있다. 아직은 미국 시설의 비중이 높아 보이지만, 국가 경쟁력을 위해 시설에 투자하라는 것이 보고서의 첫 번째 결론이었다.

미국, 중국처럼 큰 나라도 아니고, 유럽처럼 이웃과 왕래가 쉽지 않은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건설에서 폐쇄까지 과학시설의 전주기를 국가 전략으로 다뤄야 한다. 적어도 컨트롤 타워 없이 개별적, 산발적으로 추진하던 시설 건설을 지양해야 한다. 중이온가속기의 쓰라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