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 추워야 꽃을 피운다

  • 오피니언
  • 시사오디세이

[시사오디세이] 추워야 꽃을 피운다

양성광 혁신과경제연구소장

  • 승인 2021-11-29 08:30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양성광이사장
양성광 소장
며칠간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그치고, 모처럼 파란 속살을 드러낸 맑은 하늘엔 뭉게구름이 무심히 떠 있다. 오래전에 사두었던 튤립 구근이 생각나 텃밭에 옮겨 심었다.

기다리는 것이 싫어서 지금껏 복권을 사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일부러 며칠이나 몇 달을 내버려 둘만큼 여유가 생겼나 보다. 하루하루를 설레며 기다려야지 -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꽃들이 파란 하늘 속 하얀 뭉게구름과 어우러질 5월의 멋진 어느 날을 고대하며.

그러나 산비탈 맨땅에 심은 튤립 구근은 안타깝게도 껍질이 까진 양파처럼 창백하게 하얀 알몸으로 겨우 10㎝의 흙 이불을 덮고 한겨울 삭풍을 견뎌야 한단다. 안쓰러운 마음에 거실 화분에 심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면 꽃을 피울 수 없다.

많은 식물이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보내야 다음 해 봄에 꽃을 피울 수 있다. 대표적인 식물이 겨울 보리다. 겨울 보리를 따뜻한 온실에서 계속 키우면 아예 꽃이 피지 않는다. 꽃이 피지 않으니 당연히 보리 알곡도 얻지 못한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등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은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이 피는데, 사실은 지난해 늦가을에 만들어 둔 꽃봉오리에서 꽃이 피는 것이다. 여름이 지나고 낮이 짧아지면 식물의 일부가 꽃눈으로 분화하는데, 이 꽃눈 조직은 가을까지 자라다가 날씨가 차고 건조해지면 개화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발현하여 휴면기에 접어든다. 그런데 일정 시간 추위에 노출되면 이 유전자 발현 시계의 스위치가 꺼지고, 식물은 잠에서 깨어나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나 잠시 추위에 노출되었다고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추위의 총량, 즉 냉각량이 채워져야 한다. 겨울이 깊어지고 이 냉각량이 채워지면 식물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는데, 추위가 아직 남아 있으면 겉으로는 잠을 계속 자는 것처럼 보이는 강제휴면 상태에 있게 된다. 드디어 봄이 되어 따뜻한 온도에 일정 시간 노출되면 이 시계의 스위치가 작동하여 휴면상태가 해제되고, 꽃을 피운다.

인간의 세상살이 시간도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도 어김없이 흐른다. 식물이 매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성장하는 것처럼 인간도 매해 열매를 맺고, 이 결실이 쌓여야 발전한다. 그런데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코로나의 겨울은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어서 열매를 맺기는커녕 하루하루를 버티기조차 힘들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이지만, 특히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처음 겪는 일이라서 더욱 힘들다. 청소년기에 닥치는 첫 번째 시련은 얼마 전에 끝난 수능이다. 예전에 학생들은 가끔 "교과서만 공부했는데, 만점을 받았어요."라는 재수 없는 녀석 인터뷰 때문에 복장이 터졌었는데, 요즘은 "그러다가 인서울 대학이나 가겠어?"라는 엄마의 말에 더 좌절한다. 특히 올해처럼 ‘불수능’인 해에는 아직 점수도 안 받았지만, 자꾸 틀린 문제들만 생각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논술과 면접이 남았는데도, 패닉 상태가 되어 정말로 한해 농사를 망쳐버릴 수 있다.

지금은 캥거루처럼 부모의 품속을 파고드는 아이를 꼭 안아주고 다독여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가만히 지켜봐 주면 며칠 뒤 아이는 스스로 떨쳐내고 다시 집중한다. 인생의 긴 여정에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난다고 자신의 실패담을 솔직하게 들려주는 부모가 더 부모답다. 이런 가정의 아이는 겨우 첫 번째 추위에 놀라서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뎌낸다. 그리고 늦어도 자신의 시계에 맞춰 꽃을 피운다.

식물들이 꽃을 피우기 위한 냉각량은 개나리 -90, 벚꽃 -100과 같이 서로 달라서 개화 시기도 각기 다르다. 사람도 누구는 빨리 열매를 맺어 좋은 대학에 가고 취업도 쉽게 하지만, 어떤 이는 더 오랜 시간 추위를 견뎌야 결실을 본다. 성급하게 재촉하여 너무 일찍 꽃망울이 터지면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얼어 버릴 수 있다.

주어진 추위의 총량을 겪어야 꽃이 피는 것은 운명이다. 다그치는 부모보다는 스스로 꽃눈을 틔우고 열심히 자양분을 모아서 모진 겨울을 견뎌낼 수 있도록 아이의 ‘깐부’가 되어주자. 벌써 활짝 핀 꽃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양성광 혁신과경제연구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