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어렸을 때 공동묘지 부근에서 살아서인지 삶보다 죽음에 더 익숙했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를 깨닫기로는 석가보다 훨씬 조숙했다. 그러나 이 허무는 맹자가 군왕들과 감히 맞짱 뜰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노르웨이 출신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죽음은 내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의식은 온통 죽음이 지배했다. 그래도 그는 80세 생일을 넘기도록 오래 살았는데, 이는 뭉크 스스로 의외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맹자가 매일 대했던 죽음이 살아있는 지식이 된 것처럼, 뭉크의 전 생애에 걸친 죽음의 트라우마도 오히려 그의 작품의 일관된 주제가 되었다.
뭉크가 살았던 19세기 말은 젊은이들이 죽음의 본질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시대였다. 생명의 신비, 예고 없이 닥치는 죽음, 사랑의 배반에 따르는 괴로움 등은 그 시대를 살았던 예민한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된 고민이었다. 그러나 탁상공론적인 그들과는 달리 뭉크가 마주한 죽음은 현실이었다.
뭉크는 의사인 아버지와 이지적이고 자상한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빈민가에서 의료봉사를 주로 했던 의사였다. 그래서 정서적 안정이 필요했던 시기에 가족들은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 다녔다. 거기다 다섯 살 때는 어머니가 서른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14살 때에는 엄마처럼 따르던 누나 소피마저 죽었다. 그리고 이어진 동생들의 죽음과 26살에 맞이한 아버지를 끝으로 죽음의 잔치는 끝이 났다. 그 전쟁터에서 다행히도 막내 여동생과 함께 뭉크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죽음의 불안과 공포와 지병인 류머티즘과 폐결핵은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뭉크를 따라다녔다.
이처럼 죽음과 질병에 노출된 환경은 뭉크가 일찍부터 자화상에 관심을 가지도록 했다. 근대화가 중에는 뭉크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가 없다고 할 정도다. 바로크 시대의 렘브란트에 비유될 만큼인데, 자화상을 그린 이유 또한 렘브란트처럼 자기성찰이 주목적이었다.
1893년에 그려진 '절규'는 뭉크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그린 것이다. 내면세계에 관한 탐구, 잠재의식에 관한 관심, 자아에 대한 발견은 뭉크가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주제들인데, '절규'는 자신은 물론 현대인의 불안을 대변하고 있다. 화면 앞에 있는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있는 해골 같은 얼굴이 내지르는 비명은 시각이 청각화되어 관객에게도 환청으로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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