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학 교수 |
당시 도미에의 눈에 비친 사법부와 법조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세기 당시 '유산계급의 부지런한 가정부' 소리를 듣던 법조인이었기에 탐욕스러움, 교만, 냉소, 허위의식의 색으로 채색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법조인과 정치가로 상징되는 프랑스 사회의 부도덕성과 추악함을 힘찬 윤곽선과 대담하게 강조한 사실주의적 세부 묘사 기법을 통하여 들추어내었다.
독일의 위대한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도미에의 사법풍자화를 본 느낌을 갖고 판사의 모습을 먼저 살펴보자. 그의 눈에 비친 판결을 선고하는 판사는 사람 잡아먹는 귀신, 사람의 얼굴을 한 식인종이지 결코 재판관이 아니었다. 자신이 미리 예단한 죄책에 대한 자유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기회를 주지 않는 판사일 뿐이었다. 또 검사는 어떤가? 가슴에 손을 얹고 확신에 찬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정적을 엄하게 다스리는 것은 가슴 아프기 그지없지만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고 자기 세뇌를 하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변호사의 모습은 더욱 신랄하다. 그들의 웃음은 추악하고 저열하고 냉소적·악마적·조롱적이며 음흉하기까지 한 존재로 그려진다.
결국 도미에의 눈에 비친 법조인의 모습은 각 개인에게는 지구의 중심적인 사건일지라도 법조인에게 사건 당사자는 그저 원둘레 위에 이어진 점 하나에 불과한 존재로 취급하는 모습이었다. 법조인들의 오만한 얼굴에 새겨진 글귀는 "나의 상전은 법률, 그것이 정당하든지, 부당하든지 상관없다"로 압축되었다.
도대체 도미에는 왜 이렇게 법조인을 부정의 대명사로 인식했을까? 그저 삐뚤어진 세계관을 가진 이상한 화가였기에 그럴까? 아니다. 도미에는 법조인의 격정적인 몸짓이 그릇되고 진실하지 못할 때 풍자화로 그 위선과 탐욕, 비겁함을 표현한 것이다.
150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 한국의 법조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도미에의 눈에 비친 그런 모습이 아니라 권위 있고, 자상하며,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권력에 약하고, 허위의식에 빠져 있으며, 형식논리만으로 만사를 재단하는 법만능주의를 교주 삼아 일신의 안위만을 꾀하면서 자기들만의 울타리에 갇혀 있을까?
사법부의 최고수장이 구속되고, 대법관을 비롯한 최고위 법관들이 줄줄이 재판받는 처참한 시대에 법조인들은 그것의 옳고 그름을, 문제 여부를 따져보고 뒤돌아보는 그런 형식적 기회조차 제대로 한번 가져 본 적이 있던가? 판사를 지원하는 동기가 통칭 '워라밸'을 추구하기에 적합한 직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음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민사재판의 담당 판사를 거론하면서 그가 진보 판사인지, 보수 판사인지를 먼저 묻는 풍조가 일고 있음은 또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검찰청 세상에서 펼쳐지는 모습들은 어떤가? 가히 목불인견이다. 같은 구성원끼리 고소, 고발과 징계가 남발되는 모습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코미디 같은 풍경들이 속출하고 있음에도 어느 법조 원로 한 명 나서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 보통 시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얄팍한 법률 지식으로 각 정치진영의 공격과 방어논리만을 화려하게 꾸며내는 법기술자로서의 변호사들의 속 빈 강정 같은 모습은 또 어떤가? 정답을 찾지 못하겠다.
지금 한국에 도미에와 같은 사실주의 풍자화가가 있다면, 법조인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릴까? 이문열이 소설로 그려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 조금 무섭다….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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