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천은 시민들에게 접근성이 좋도록 목재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그 가장자리에는 주황색 우단의 매혹적인 메리골드가 가을 햇살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과 우정으로 피어있었습니다. 대전천을 가로지르는 돌 징검다리에 물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바람에도 길이 있나 봅니다. 흔들리며 쓰러지다가도 꺾이지 않는 배반을 꿈꾼 적 없는 물 억새가 은빛 물결로 공활한 가을 하늘을 두고 눈물도 없이 멀미를 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대전역에서 구 충남도청까지 걷다 보면 더러는 아는 사람도 만날 수 있어 살가웠던 목척교는 소통의 장이자 추억의 길이었지요. 이제는 그 시절에 대한 추억과 공간에 대한 기억이 옅어졌지만 그런 삶의 스토리인 시절정경(時節情景)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누구나 한번쯤 중앙시장 먹자골목에서 술 한 잔을 걸치고 그 당시 대전의 번화가였던 중앙데파트, 홍명상가 광장에서 내려다보았던 대전천은 만인산 봉수레미골에서 발원한 대전의 모천입니다.
사실 대전부르스 축제는 대전역을 메인 무대로 개최되어야 제격이지만 예전의 모습도 기능도 변화무쌍하게 진화된 대전역 광장에서는 수십 년 된 추억을 소환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대전부르스'는 1959년 어느 날 밤 대전에 출장을 온 신세기레코드사 최치수가 밤 12시 40분경 대전역에서 젊은 청춘 남녀가 두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가사를 썼으며 작곡가 김부해가 3시간 만에 곡을 붙였다지요. 그리고 가수 안정애가 음반을 내면서 히트를 치고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0시 50분 열차는 없어졌지만 1963년에는 '대전발 0시 50분'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조용필 장사익에 의해 리바이벌 되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애창되고 있지요.
그리하여 대전역의 대명사가 된 대전부르스를 그리워하며 기획된 '대전부르스 축제'는 바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를 재현하는 뉴트로(Newtro) 거리문화축제입니다. 뉴트로는 새로운(New) 것과 복고풍(retro)의 혼성어로 과거의 것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 맞게 해석하여 재창조된 기존 복고풍과의 차별성을 부여하면서 밀레니얼 세대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대전부르스 축제 역시 문화공감 프로그램인 감성충만 프리마켓, 버스킹 공연과 시간여행타임터널, 대전부르스도전골든벨, 요절애통가요제, 추억의가게와놀이, 전국레트로댄스경연대회와 시민들이 참여하는 추억과 재미 그리고 공감의 무대로 마련되었습니다.
11월은 연두와 노랑과 붉은색의 교집합이 혼재하는 계절의 플랫폼입니다. 돌아오는 길 문득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대전역을 만나러 갔습니다.
#.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가 떠나고 있었어
안경이 없으면 당달봉사처럼 서너 발짝 앞의 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던 학수가 그날 술에 진탕 취한 채 역 광장에 넘어져 벗겨진 안경을 찾지 못하고 마지막 통학열차를 놓쳐버린 건 순전히 그의 첫사랑 영숙이와 헤어진 후였지 녀석은 그때 한창 유행하던 '나는 못난이'를 십팔번으로 달고 살았어 아마 마흔일곱 해 전 가을이었을 게야 그런데 말이야 오늘도 쉰도 넘기지 않은 우리 엄마가 아침밥도 거른 채 경상도에서 쌀 한 말을 이고 청승스럽게 대전역 플랫폼을 나서고 있네 가난한 양식이지만 나는 얼른 마중을 가야겠어 아직도 가락국수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거든 그래 내 젊은 날들로 만나지는 대전역은 지금쯤 벌써 늙어버렸어야 하는데도 자꾸만 젊어지고 있는 거야 벤자민 버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가고 있어
브래드피트가 된 나는 지독한 치매에 걸리고 말았어― 권득용의 시 '대전역' 전문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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