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색맹

  • 오피니언
  • 교단만필

[교단만필] 색맹

대전괴정중 박찬영 교사

  • 승인 2021-11-18 10:56
  • 신문게재 2021-11-19 18면
  • 조훈희 기자조훈희 기자
박찬영 교사 사진
대전괴정중 박찬영 교사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더욱 마음이 안 좋았던 건 아이가 떠나기 하루 전에도 나는 그 반에서 아이들을 웃겨가면서 수업을 했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갈등했던 영혼 앞에서 나는 무엇을 가르쳤던 걸까. 그날 밤 늦게까지 뒤척이며 시를 적어 내려갔다. 시 말미의 독백 사이사이에 툭툭 떨어지던 말줄임표가 교사로서의 무기력을 자책하던 눈물처럼 점점이 박혔다. 한 아이의 죽음이 내 시의 시작이었다.

*****

마음의 색맹

수업을 한다 // 색맹을 얘기하고 / 유전자를 말하고 / 가계도를 칠판에 그려낸다 // 아이들은 듣는다 / 푸른빛 마음으로 / 분홍빛 마음으로 / 회색빛 마음으로 // 나는 바라본다 / 각기 다른 빛깔의 마음으로 // 어디를 바라보고 / 무엇을 바라보고 / 누구를 바라보고 수업한 것일까? / 나는 // 누구를 바라보고 / 무엇을 듣고 / 어떤 것을 느끼며 앉아있는 것일까? / 아이들은 // 마주 서 있다고 / 서로를 보는 것은 아니다 // 마음의 색을 보지 못하는 나는 / 마음에 대한 색맹일지도 모른다



*… 견디기 힘든 것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영혼을 보지도 못하고. 그 앞에 서 있었는데도 이미 그 존재 앞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조차 되어주지 못했었다는 거지… 알아볼 수 있었다면… 따스한 말 한 마디 안겨주었더라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때늦은 후회를 해 본다는 거지…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만하는 것을 말하고 있고, 말해야하는 위치에 있는 이 순간에… 인생 참 허망하다… 라는 느낌을 안고 있다는 거지… 이제는 어깨를 눌렀던 그 짐을 툭툭 털어내고 날아가기를… 하늘로 올라 별이 되기를…

*****

16년 만에 먼지 앉은 기록을 들춰본다. 운율도 안 맞고 서툴지 그지없다. 형식은 허술하지만 내용 앞에서 나의 심장은 여전히 뛴다. 건조하게 푸석거리던 꽃차에 물을 부은 듯 마음이 물컹해진다.

그때나 지금이나 OECD 국가 중 여전히 자살률이 1위인 나라. 하루 평균 36.1명이 삶을 저버리는 나라.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9년 연속 '자살'인 나라. 절반에 가까운 1318 청소년들이 공부 문제로 고민하는 나라에서 나는 교사다.

공부를 꽤 잘하는 아이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 아이가 어떤 이유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이유가 절반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주변에 있던 어른들은 그 이유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을 영혼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눈물짓고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가끔 상상한다. 마음의 색깔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몹시 곤란할 때도 있겠지만 흑백의 마음이라도 눈에 보인다면 좋을 텐데. 무채색이 색깔을 띠는 순간에는 초신성처럼 폭발한 다음 은밀하게 사라지더라도 말이다.

'색맹은 관련 유전자가 성염색체인 X염색체 위에 있는 반성 유전이야. 유전자형은 X′X′, X′Y로 표시해. 열성으로 유전이 되지. 여성보다 남성에게 더욱 많이 나타나. 자, 이제 가계도에서 유전자형을 분석해볼까?' 지금도 나는 여전히 색맹을 가르친다. 색맹을 둘러싼 과학지식을 창고 대방출하며 각기 다른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나에게 '색맹'이란 과학을 넘어서는 뜨거움이다.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다보니 각기 다른 표정이 눈으로 들어온다. 문득 깨닫는다. 강아지풀의 솜털을 바라보듯 바라본다면 이들의 색깔을 구분할 수도 있음을. 마음의 색맹에는 '관심'이라는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을. 어쩐지 눈동자에서 색깔이 보이는 듯하다.

대전괴정중 박찬영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대전 고교 당일 급식파업에 학생 단축수업 '파장'
  2. 대전 오월드서 에어컨 실외기 설치 작업자 추락해 사망
  3. 열악했던 대전 여성노숙인 쉼터…지원 손길로 '확 달라졌다'
  4. "뿌리부터 첨단산업까지… 지역과 함께 혁신·성장하는 대학"
  5. 대전 중구 교육부 평생학습도시 신규 선정 '중구가 대학, 온마을이 캠퍼스'
  1. 대전교사들 "학교 CCTV 의무화, 사건 예방에 도움 안돼" 의무화 입법에 반발
  2. 계룡산성 道지정문화재 등록 5년째 '보류'…성벽과 기와 무너지고 흩어져
  3. 대전 금고동 주민들 "매립장·하수처리 공사장 먼지에 농사 망칠판" 호소
  4.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5.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헤드라인 뉴스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르포] 4·2 재보궐 현장…"국민통합 민주주의 실현해야"

"탄핵정국 속 두 쪽으로 갈라진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고 민주주의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4·2 재보궐선거 본 투표 당일인 2일 시의원을 뽑는 대전 유성구 주민에게선 사뭇 비장함이 느껴졌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를 통해 주권재민(主權在民) 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발현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저마다 투표소로 향한 것이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유성구제2선거구의 온천2동 제6투표소 대전어은중학교는 다소 한산한 풍경이었다. 투표 시작 후 4시간이 흘렀지만 누적 투표수는 고작 200표 남짓에 불과했다. 낮은 투표율을 짐..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눈덩이 가계 빚' 1인당 가계 빚 9600만 원 육박

국내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약 9500여 만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40대 차주의 평균 대출 잔액은 1억 1073만 원으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이 한국은행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기준 가계대출 차주의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은 9553만 원으로 조사됐다. 이는 관련 통계가 작성된 지난 2012년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이다. 1인당 대출 잔액은 지난 2023년 2분기 말(9332만 원) 이후 6분기 연속 증가했다. 1년 전인 2..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요즘 뜨는 대전 역주행 핫플레이스는 어디?... 동구 가오중, 시청역6번출구 등

숨겨진 명곡이 재조명 받는다. 1990년대 옷 스타일도 다시금 유행이 돌아오기도 한다. 이를 이른바 '역주행'이라 한다. 단순히 음악과 옷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권은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려 재차 살아난다. 신규 분양이 되며 세대 수 상승에 인구가 늘기도 하고, 옛 정취와 향수가 소비자를 끌어모으기도 한다. 원도심과 신도시 경계를 가리지 않는다. 다시금 상권이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는 역주행 상권이 지역에서 다시금 뜨고 있다. 여러 업종이 새롭게 생기고, 뒤섞여 소비자를 불러 모으며 재차 발전한다. 이미 유명한 상권은 자영업자에게 비싼..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친구들과 즐거운 숲 체험

  • 한산한 투표소 한산한 투표소

  •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 앞 ‘파면VS복귀’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