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스테이크 앞에서는 평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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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난순의 식탐] 스테이크 앞에서는 평등하지 않다

  • 승인 2021-11-17 10:40
  • 수정 2021-12-02 10:14
  • 신문게재 2021-11-18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우난순 수정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또 휴학을 하고 고향 집에서 빈둥거리던 시절이었다. 징글맞은 학교와 도시를 벗어나니 한없이 한가로웠다. 요양 차 내려온 딸내미를 보는 부모는 복창 터질 일이지만 이렇다 저렇다 한 마디도 안했다. 먹고 놀고 먹고 놀고. 한량이 따로 없었다. 한낮의 열기에 매미가 지릉지릉 울어대던 8월 어느 날, 신문에 나온 광고를 봤다. 국내 굴지의 커피 회사에서 커피를 주제로 한 문학상을 만들었는데 상금이 눈에 확 들어왔다. 대상이 500만원. 30여년 전 이었으니 그때 돈으론 꽤 큰 액수였다. 읽는 건 좋아하지만 글이라곤 한번도 써본 적 없는 터라 언감생심이었다. 그냥 재미삼아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끄적끄적 시라는 걸 하나 써서 우편으로 부쳤다.

2개월 후 신문 하단에 결과가 발표됐다. 가작에 내 이름이 있었다. 상금은 30만원. 얼래? 30만원이 생겼네? 다분히 회사 홍보 차원에서 만든 상이어서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가작에 이어 입선까지, 입선은 스무 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단풍이 물든 늦가을에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태어나서 첫 상경이었다. 시상식장이 프레스센터였는데 엄청 큰 홀에 들어서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원탁테이블에 앉았다. 스푼, 포크, 나이프가 놓여있는 걸로 봐서 양식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됐다. 기름 바른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나비 타이를 맨 웨이터들이 분주히 오가며 음식을 내왔다. 말로만 듣던 비프 스테이크였다. 가수 한경애가 현악 4중주의 연주소리에 맞춰 대상작을 낭독하는 가운데 난 옆 사람이 먹는 걸 훔쳐보며 눈치껏 따라 먹었다. 뭔진 모르지만 마가린 같은 걸 빵에 발라먹었는데 풍미가 기가 막혔다. 버터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배가 고픈 참이라 스테이크는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작아 보였다. 저걸로 양이 찰까? 그런데 그 맛이 천상의 맛이었다. 고기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부자들이 먹는 음식을 처음으로 먹었다.

내가 어렸을 때 고기는 명절에나 먹는 음식이었다. 그것도 돼지고기나 닭고기 정도였다. 중학교 때 친구가 아침에 먹고 온 소고기국이 맛있다고 해서 도대체 소고기 맛이 어떨까 골똘히 상상했었다. 냉혹한 자연과 비열한 경쟁사회에 대한 인식에 천착한 잭 런던의 짧은 소설 '스테이크 한 장'은 늙은 권투선수의 비애를 담은 이야기다. 스테이크 한 장만 제대로 먹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텐데.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늙은 복서는 비통해하며 울음을 토해낸다. 잭 런던이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았던 시대에 최상의 요리로 장식한 유럽 귀족들의 식탁은 위세의 상징이었다. 어느 시대 어디라 할 것 없이 식탁은 빈부 격차의 지표로 작용한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의 계급이다." 식문화가 사회 불평등에 크게 기여한다고 주장한 데이비드 브룩스의 말이다. 얼마전 베트남의 공공안전부 장관이 영국의 고급 식당에서 식용 금박을 입힌 스테이크를 먹어 화제가 됐다. 그가 먹은 스테이크 가격은 1천 달러로 베트남 국민 5개월 치 월급이란다. 그걸 한 끼로 먹은 것이다. 서민들은 입이 딱 벌어지지만 있는 사람들에겐 일상 아닌가. 부자의 식탁과 빈자의 식탁. 국민일보 기획기사 '빈자의 식탁'은 한국의 저소득층이 무엇을 먹는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하루에 두 끼를 라면으로 먹거나 일주일 중 사흘간 삶은 국수에 설탕만 뿌려 먹은 사람도 있었다. 어떤 이는 몇 년 동안 과일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밥 먹는 데 가장 마지막으로 지갑을 연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더 많다졌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식탁엔 어떤 음식이 올라오는가. 밥 한술 편히 뜨고 있는지 안부 전한다. <지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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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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