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은 몸짓으로 현상을 전한다. 진위(眞僞)의 말이 없다. 오직 제목 만이 작품의 의도를 함축한다. <원형하는 몸>의 '원형'은 둥근 것을 뜻하는 원(圓, circle)과 본질로 간다는 원(源, origin), 그리고 심리학자 칼 융의 원형(原型, archetype)까지도 생각하게 했다.
먼저, 공연장을 묘사해본다.
무대 앞 상공에는 크고 묵직한 얼음이 매달려있다. 얼음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은 5m 아래 투명 반구 안으로 낙하한다. 무대의 벽은 대형 거울 2장이 맞대고 두 면을 이룬다. 바닥과 두 거울 벽이 만나는 세 모서리는 서로 수직을 이루며 3차원 공간을 만든다. 거울은 한 무용수를 비추어 두 명을 만들기도 하고, 똑같이 춤추는 다섯 명으로도 보이게 한다. 형상이 출렁이듯 거울에 비춰지기 때문에 무대 또한 녹고 있는 거대한 얼음 큐브 같다. 물방울 소리를 기저로 살갗에 소름이 돋는 추위가 느껴지는 음향은 파장이 길게 울린다. 그리고 어둡고 푸른 잉크 빛이 감도는 조명은 빙하를 안고 있는 깊은 바닷 속의 고독과 같다. 무대, 음향, 조명이 총체적인 한덩어리가 되어 무용가를 맞이한다.
차진엽의 '원형하는 몸' 독무 |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안개로 바뀌어 수증기가 된다. 물의 순환은 지구 생명의 순환이다. 원 운동과 높이의 변화를 시간의 순서대로 x축에 나타낸 함수가 y=sin x 이다. 양과 음을 주기대로 반복하며 본질 안에서 규칙성을 가지고 변화한다. 원(圓)이고 반복이며 끝없는 환생이다. 그러나 실제 인간은 다르다. 물은 의지가 없지만 인간에게는 의지라는 것이 있다. 과거와 같은 삶이 오늘과 미래에 똑같은 패턴으로 기다리고 있다면 우린 암울할 것이다. 인간이 그리는 함수는 변수가 가득한 변화무쌍한 초월함수다. 주어진 운명도 바꿀 수 있는 강한 것, 바로 진화에 대한 강한 의지이다. 그리고 초월의 힘이 발휘되어 결과도 바꾸는 것은 여러 사람 간의 에너지이다. 검은 의상을 입은 4명의 무용수는 죽음, 각자의 고뇌, 새 생명, 그리고 관계를 통해 새 생명을 얻고 각기 새로운 색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원형하는 몸 포스터 |
까닭모를 나의 행동 패턴은 무의식 속에서 내게 굴레가 된 신념과 관습에 의해 움직인다. 존재의 씨앗인 무의 식에 집단적 심리 원형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페르소나라고 불리는 사회적 가면(mask)이다. 차진엽의 안무에는 여성성도 표정도 화려한 의상도 없다. 모든 가면을 내려놓았다. 심지어 공연 첫머리에 마스크를 쓰고 등장하여 그것 마져도 벗고 무대 밖에 내려놓는다. 코로나 시대 임에도 불구하고! 흑백의 의상은 인간의 움직임만 포착할 뿐이다. 그 안에서 틀에 얽매인 어떠한 신념도 찾을 수 없다. 동물적 움직임만 있다. 이것은 인간의 무의식을 조종하는 사회적 원형인 관념들을 과감히 배제하고 인간의 근원만 남긴다. 남녀가 섞여 춤을 추지만 그 어떠한 성(性)도 드러내지 않고 생명의 순환만 나타낸다. 최소의 미립자인 물의 변화에서 오는 통찰로 본질을 인지하고 전과는 다른 존재로 깨어난다.
무색의 작은 빛에서 시작된 공연은 4명의 무용수에게 각기 다른 유채색의 그림자를 부여한다. 그리고 하늘극장의 지붕이 열리고 자연 빛에 무대 위의 무용수와 관객 모두가 드러난다. 각양각색. 그리고 빛에서는 마스크에 의해 다시 감추어 지는 나. 사회 속 보편적 우리들…….
깨달음은 빛의 존재를 상상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곳에 의식의 빛을 비춤으로써 얻는 것이다.ㅡ칼 융
얼음을 씹어 먹듯 무의식의 원형을 깨부수고 끊임없이 새롭게 잉태되는 나, 분명 예전의 나는 아니지만 나라는 본질은 그대로이다. 어둠에서 보이는 내면의 나. 부끄럼도 가식도 내려놓은 나를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 무수히 변형된 다른 원들을 그려나가며 생을 살아감을 물로 표현한 예술. <원형하는 몸> 심의(深意)의 몸짓은 모든 것을 얼음처럼 차갑게 표현했지만, 나의 내면은 뜨거움으로 가득했으니 이 얼마나 역설적 통찰인가?
장주영/ 수필가, 대전도시과학고등학교 교사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