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흥이 일어서 갔고, 흥이 다해 돌아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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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길의 문화예술 들춰보기] 흥이 일어서 갔고, 흥이 다해 돌아오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 승인 2021-11-12 15:51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ㅎ호ㅗ
방대도(訪戴圖), 신위(1769-1847), 종이에 수묵담채, 17×2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눈비가 내리고 연일 무척 쌀쌀하다. 일부 지역에 내린 첫눈은 지난해보다 한 달, 평년보다 10일 정도 빠르다 한다.

그해 겨울 처음 오는 눈도 첫눈이고, 우리가 대하는 사물의 처음 들어오는 인상이나 느낌도 첫눈이다. 첫눈은 예사 눈과 느낌이 다르다. 눈에 보이는 대상도 처음이지만, 바라보는 이의 마음도 처음이라서 치우침이 없다. 백지장에 그려질 기대가 벅차서일까? 상서로움, 반가움, 흐뭇함, 기쁨으로 다가온다.

첫눈은 목석도 달뜨고 설레게 한다. 어느 날 한밤에 깨어보니 눈이 펄펄 내린다. 어둠이 멈추는 세상 끝까지 모두 하얗게 바뀌었다. 첫눈인데 눈발이 소담하기 이를 데 없다. 술병 찾아 한 잔 마시며 시 한 수 읊조리니, 문득 거문고 명인이 보고 싶어진다. 사람도 사람이지만 음률이 듣고 싶은 게다. 그는 산 넘고 물 건너, 멀리 살지 않는가? 거리가 대수이랴. 눈 내리는 뜨락 들마루에 앉아 거문고 타고, 피리 불며 시를 짓는 것이 얼마나 멋진 풍류인가? 생각만 해도 흥이 절로 솟는다. 서설(瑞雪)이 너무 좋아 온몸으로 즐기며 찾아 나선다. 막상 친구 집에 다다르고 보니 흥이 다 한다. 문 앞에서 그만 발길을 돌린다. 왜 그냥 돌아섰는지 의문 아닌가? 먼 훗날 물으니, 그가 말한다. "흥이 일어나서 갔고, 흥이 다해 돌아왔을 뿐이네. 어찌 안도(安道)를 꼭 만나야 하는가."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며 그 과정을 향유한다.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초탈의 경지를 보여준다. 눈 내리는 속에서 마구 뛰어노는 아이의 천진난만(天眞爛漫)함 그대로이다.

설중방우(雪中訪友) 고사다. 산음야흥(山陰夜興), 승흥방우(乘興訪友), 설야방대(雪夜訪戴)로도 불린다. 주인공은 왕휘지(王徽之, ? ~ 383, 중국 동진 서예가)다. 서성 왕희지(王羲之, 307 ~ 365)의 다섯째 아들이다. 글씨는 아버지에 못 미쳤지만, 풍류만은 조금도 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왕휘지가 떠올린 사람, 안도는 대규(戴逵, ? ~ 396)를 이른다. 안도는 그의 자이다. 학문이 깊은 데다 조각가요, 화가요, 거문고 명인이었다. 고상한 인품덕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았다 전한다.



세속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욕망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고사도의 주제가 된다. 왕휘지가 대규를 찾아간 그림 <방대도(訪戴圖)>가 그것이다.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 ~ 1847, 조선 시·서·화 3절)가 그렸다. 그림 좌측을 채우고 있는 제화 시부터 보자.



햇살이 얼어붙고 바람 거세게 부르짖네

누각 그늘과 먹빛 산이 합쳐 어렴풋하구나

꿈에서 돌아오니 술기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인적 고요하고 향 연기 술항아리에 여전하네

한 점 눈 날아들어 벼루에 떨어져 녹고

마른 소리 휘몰아치니 차가운 갈대 요동치네

우연히 수묵으로 황공망과 미불을 참조하여

홀연히 정신이 노닐으니 방대도로다



첫눈이 내려 술 마신 후 쓰다. 황공망이면서 황공망이 아니고, 미불이면서 미불이 아닌 화법이다.

(日脚凝氷風怒呼 樓陰山黛合?糊 夢回酒氣全消席 人靜香煙尙在? 一點斜飛融?硯 乾聲驟至變寒蘆 偶然水墨參黃米 驀地神遊訪戴圖. 初雪酒後 自題 黃不黃米不米法)



신위는 정의롭고 유능한 정치인로 이조참판,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시서화 모두 빼어나 진정한 삼절로 불린다. 특히 시는 한국적 특성을 찾으려 노력, 추사 김정희도 생전에 "두보(杜甫)의 시를 배우듯 신위의 시를 읽는다" 했다 한다. 전하는 시도 무려 4천여 수에 달한다. 서풍은 고전적 면모를 보인다. 그림은 이정·유덕장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불리나, 전하는 그림은 많지 않다.

간결한 터치로 그림을 완성하였다. 화제에 나오는 미불과 황공망 둘 다 박학다식하였다. 자연친화적인 황공망의 절개, 미불의 화론도 따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예술보다 인격도야가 먼저라 생각하여,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 보다 마음속에 그리는 것을 더 중히 여겼다. 그림과 이상뿐만 아니다. 작가 자신도 소탈하고 대범하여, 아름다운 일화가 많이 전한다.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눈이 내리면 무엇인가 그립기도 하다. 첫눈이 내릴 때 누구에게나 돋아나는 순진무구(純眞無垢), 그것이 우리의 본질 아닐까? 그 흥취를 지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숙제 아닐까?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양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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