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명창 박록주와 그 제자 성우향(오른쪽). 1977년 4월 서울 박록주 자택에서의 촬영된 모습.<국악음반박물관 소장> |
본명은 성판례(成判禮), 예명은 성우향이다. 아호는 춘전(春田), 어릴 적 이름은 '남희'였다. 성 명창은 1933년(호적 1935년) 8월 24일(음력) 전남 화순군 화순면 교리 118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창녕이고, 아버지 성영문과 어머니 김재녀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성 명창의 할아버지는 성해순, 할머니는 정모씨(鄭某氏)다. 할머니 정씨는 그의 스승인 정응민 명창과 10촌 사이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 명창은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 본인의 판소리 전수소에서 노년까지 후학을 양성했다. 1982년부터는 중앙대 등 전국 10여개 대학교에서 판소리 강사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은퇴 후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 요양원에서 지낼 때도 병문안 온 제자들을 옥상으로 데리고 가, 판소리를 다듬어 주는 등 생의 마지막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 판소리 사상 가장 많은 제자를 배출한 명창으로 꼽힌다.
성우향 명창이 1950년대 취입한 단가 '운담풍경' SP음반과 성우향 명창 옛 모습. <국악음반박물관 제공> |
성우향의 스승 정응민 명창 모습.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
수백년 동안 서민들과 함께하며 울고 웃었던 판소리는 사실, 근대 전기 5명창인 이동백, 송만갑,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 이후 급격하게 쇠퇴기를 맞는다. 신파극과 이른바 뽕짝 등에 밀린 것이다.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도 한몫 했다. 20세기 초반, 장판개 명창 등 근대 전기 5명창의 제자들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또 국악의 천시 풍조, 국악인들의 은둔과 월북 등 고난의 세월이었다. 판소리의 단절 위기였다. 심청가와 춘향가 등 5바탕 등 완창을 할 수 없는 명창들이 사라지면서 이때부터 '토막소리'가 유행했다.
정응민 명창은 근대 전기 5명창의 옛 더늠을 제대로 간직했다. 정 명창은 전남 보성에서 정착하며 제자들을 정성껏 양성했고 그래서 그의 소리제를 일명 '보성소리'라고 한다. 정응민은 스승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리를 '정응민 스타일'에 맞게 집대성해 보성소리를 구축했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는 성우향, 조상현, 성창순, 안향련 등이고 아들인 정권진 명창도 제자다. 판소리 분야의 최초 인간문화재 김연수, 정광수, 김소희 같은 명창들도 정응민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을 정도다. 정 명창은 이처럼 오늘날 판소리의 기둥들을 단단하게 세웠다. 옛 명창과 현재 명창 사이에 '정응민 교량'이 없었더라면 판소리의 대중화와 세계화는 꿈꾸기 어려울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응민은 큰아버지인 정재근에게 박유전제 심청가·적벽가·수궁가 등을 배웠고, 김찬업에게 김세종제 춘향가 등을 익혔다. 뿐만아니라 이동백과 송만갑에게도 소리를 배웠다.
1986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성우향(소리)과 김명환(고수·오른쪽)의 판소리 춘향가 완창 공연 장면. <국악음반박물관 제공> |
김명환의 증언에 따르면 정응민의 첫 스승은 이동백(李東伯·1866~1949년)이다. 이동백은 충청도 중고제의 대가다. 따라서 전라도 보성소리 정응민제는 이동백 더늠이 '많이' 들어있다.
'판소리 명창 성우향'(1998년)의 저자인 노재명 국악학자는 "근대 전기 5명창과 그 거물급 제자들이 상당수 별세한 후 조선시대의 귀중한 판소리를 쓸쓸히 온몸으로 지탱하며 전승한 인물이 바로 정응민 명창이고 그 수제자가 성우향"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우향 명창이 정응민제 보성소리를 오랜 기간 올곧게 익힌 덕분에 장중한 고형의 기품있는 판소리가 지금까지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학자는 이어 "정응민은 중고제 대가 이동백에게도 소리를 배웠기 때문에 정응민제 보성소리를 들어보면 중고제도 포함돼 있고 조선시대 어전광대들의 판소리 진수가 거의 다 들어있다"고 강조했다. /제천=손도언 기자 k-55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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