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춘순 판사 |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형사재판은 수사기관이 수집한 증거기록 일체를 공소제기와 동시에 판사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판사는 피고인을 대면하기도 전에 제출된 기록으로 사건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은근슬쩍 형성된 유죄의 심증에 사로잡힌 채 피고인을 대면했으며 기록과 달리 부인하는 피고인에 언짢은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공소장에도 없는 괘씸죄가 추가될 수 있는 배경이기도 했다.
이후의 재판과정에서도 증거기록은 법정, 즉 피고인의 눈앞에서는 제대로 펼쳐지지도 않은 채 재판이 끝났고 피고인은 판사가 언제 기록을 보고 사건 내용을 파악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야말로 판사의 심증 형성과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재판이었다.
그에 대한 반성으로 2006년경부터 공판중심주의(법정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를 중심으로 심증을 형성하는 것)를 강화하고 증거분리제출제도(공소를 제기할 때 공소장 외에는 판사에게 예단을 줄 수 있는 증거서류 등을 제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를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이후 판사들은 가급적 법정에서 증거를 살펴보고 사건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오고 있다.
그러나 형사재판의 실무는 여전히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기록 자체가 중요한 증거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고, 법정에서의 증거조사 또한 (언젠가는 판사가 사무실에서 증거기록 전체를 살펴볼 것이라는 전제하에) 증거기록 중 일부 서류의 내용을 증인신문 등을 통해 확인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루에 여러 사건을 진행해야 하는 판사가 법정에서 모든 증거기록을 일일이 살펴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법정의 증거조사를 종료한 다음 사무실에 앉아 법정에서는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증거들과 함께 기록 전체를 통째로 검토한 다음에야 비로소 사건 내용을 파악하고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게 기록을 성실하게 심리하는 판사의 모습을 영상으로 공개하지 않는 한 완전히 보이는 재판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민참여재판을 특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법정이 아닌 곳에서 따로 증거기록을 살펴볼 여지가 없는 배심원들은 피고인이 지켜보는 법정에서 다함께 보고 듣고 읽은 증거자료만을 토대로 사건 내용을 파악한다.
수사기관이 준비한 증거기록은 아무리 많아도 배심원들 앞에서는 거의 무용하게 되고, 검사는 오로지 법정에서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을 비롯한 모든 증거자료를 직접 현출시켜 사건 내용 전반에 관해 배심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해야 한다. 그에 대응해 피고인도 배심원들이 언제 어떠한 증거를 살펴보는지를 모두 지켜보며 필요한 순간에 반박하고 유리한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방어할 기회를 충분하게 보장받는다.
이처럼 국민참여재판은 재판받은 피고인의 입장에서 배심원들이 사건 내용을 파악해 가는 증거조사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보이는 재판'이라 할 수 있고, 판사가 법정 외에서도 증거기록을 검토한다는 전제에서 법정의 증거조사가 사실상 상당 부분 생략되고 있는 보통의 형사재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2008년부터 시작한 우리의 국민참여재판이 아직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형사재판이 지향해야 할 방향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어쩌면 '판사님 제가 제출한 서류들은 다 읽어 보셨나요'라는 피고인의 질문에 올바른 답도 국민참여재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머지잖아 법정에서 일일이 조사하기도 어려운 두꺼운 증거기록이 사라지고, 배심원들이 오로지 법정에서만 모든 증거를 살펴보고 사건을 파악해 가는 전 과정이 그대로 보이는 국민참여재판이 우리의 형사재판 모습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고춘순 청주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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