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따르는 서양에서의 여성의 삶이나, 결혼하면 출가외인으로 치부됐던 우리 조상의 여성의 삶이나 모두 여성은 오랫동안 어머니와 아내로 형상화되고, 집과 고향의 이미지로 퇴화돼 왔다.
젠더간 갈등이 극에 달하고, 더불어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여성으로서의 사유를 주제로 한 책들이 나란히 출간됐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진 직장내 성폭행 사건을 계기로 정상의 범주에 속하던 사람이 추락하는 과정을 그린 '마리에게 생긴 일'(이네스 바야르 지음·이현희 옮김, 민음사 펴냄, 256쪽)이 사회가 여성을 규정하는 방식과 여성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방식에 대한 모순과 불편한 진실을 그린다면, '페넬로페:전쟁에서 돌아온 여자'(주디스 바니스탕델 지음·김주경 옮김, 바람북스 펴냄, 160쪽)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고향에서의 세속적인 일상속에서 겪는 혼란을 '여성'을 내세워 얘기하고 있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어슐러 K.르 권, 지음·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 532쪽)는 미국의 대표하는 어슐러 르 귄이 '여성'을 비롯해 세계, 문학, 여행 등 네가지 주제에 얘기하며 페미니스트 작가로 거듭난 사유 과정을 보여준다
▲#가족 #성폭력...'마리에게 생긴 일'=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긴 사내 성폭력으로 서서히 붕괴돼 가는 여성을 그리고 있는 '마리에서 생긴 일'은 직장상사의 성폭행과 성폭행을 당하고도 은폐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여성으로서의 고민, 가족의 태도, 그로 인해 서서히 파멸해 가는 여성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주인공 마리가 자신의 수동성과 나약함을 책망할 때 마음을 털고 위로를 청할 가족은 부재했고, 자신의 범행을 은폐하려는 가해자 등 피해자의 2차 가해는 계속된다.
너무나 빈번히 발생하는 사내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그로인해 야기된 가족의 비극은 곳곳에서 사회가 여성에게 범하는 폭력들을 그리고, 여전히 사회안에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에 대해 얘기한다.또한 소설은 형제, 부모, 남편 등 가족 모두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적개심이 극에 달하고 그 성폭행 피해자가 가족에게 피해를 가하는 가해자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고, 여성의 권리가 높아지면서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남성들의 반발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마리에서 생긴일'은 여전히 사회가 여성을 규정하는 방식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현실적 위치를 그린다.
▲#글 쓰는 여자 ...'세상 끝에서 춤추다'= 지난 1989년 출간된 '세상 끝에서 춤추다'는 폐경, 유토피아, 여행기, '하늘의 물레' 공청회를 둘러싼 문학의 검열 문제, '스타 워즈'에 관한 감상 등 밀접한 삶의 단면에서부터 SF의 경계까지 다양한 소재를 망라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전반에 걸쳐 발표했던 르 귄의 강영용 원고, 에세이, 서평이 수록돼 있는 이 책은 1990년 르 귄의 '테하누'의 집필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테하누'는 20년만에 르 귄의 작품 중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된 작품이다. 또한 책은 뛰어난 인류학자였던 아버지 앨프리드 크로버에 비해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가려져 있던 어머니 시어도라에 대한 기억을 볼 수 있는 '시어도라', '여자 어부의 딸' 두 편이 수록해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를 고민한다.
르귄이 페미니스트 작가로 성장하는데 영향을 준 어머니 시어도라는 최후의 아메리칸 원주민이었던 이시에 대한 기록을 남편 앨프리드와 함께 남긴 지적동반자이자, 딸에게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에 관해 쓰라고 권했던 인물이다.
르 귄은 책을 통해 시어도라 크라코프는 첫 결혼 후 시어도라 브라운으로 이름이 바꼈으며, 두 번째 결혼 후에는 시어도라 크로버, 세 번째 결혼 후에는 시어도라 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며, '불편하지만 성기신'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같은 사회적 불평등을 불평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같은 특수한 상황이 여자 작가를 단순한 저자라는 일차원적 자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책임을 갖고 있는 글쓴이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여성 #가정 #사명감...'페넬로페: 전쟁에서 돌아온 여자'=그리스 서사시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 해석한 '페넬로페'는 인도주의 의료단체에서 일하며 시리아의 환자들을 돌보던 페넬로페가 휴간 기간 집으로 돌아가 겪는 혼란과 불안을 그린다.
벨기에 집으로 돌아온 페넬로페는 시리아에서 치료하다 죽어버린 소녀를 떠올리고, 이와는 반대로 라틴어 시험과 남자 친구 문제로 고민하는 벨기에의 10대 소녀와의 간극을 깨닫는다. 길을 걷다가도 폭탄에 맞아 죽을 수 있는 위태로온 소녀의 세계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고심하는 안온한 벨기에의 삶은 오늘날 이민자에게 극단적인 반감을 내보이는 유럽과 그 사이 고민하는 유럽 지식인들의 죄의식과 맞닿아 있다. 또한 성공한 외과 의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는 페넬로페가 겪는 혼란을 펼쳐 놓음으로써 현대 여성이 겪는 다양한 방면의 고통을 들여다 본다.
폭탄이 쏟아지고 피흘리는 소녀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짐을 꾸리는 페넬로페의 모습은 여행자 오디세우스의 현대적 여성 버전이다. 작가 주디스 바니스탕델은 벨기에서 가장 주목받는 그래픽노블 작가로, 유럽의 무거운 주제를 컷 분할된 만화를 통해 독자들에게 쉽고 편하게 전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오희룡 기자 hu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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