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의 등장은 여성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 시켰다. 물론 가사 노동에서 해방됐다고 해서 여성이 모든 노동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걸리기만 하면 손쓸수 없이 죽어버려 모든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던 암도 이제는 정복 가능한 질병이 됐다. 일상을 무너뜨린 코로나 팬데믹도 올 연말이면 먹는 치료제가 공개된다고 하니, 과학의 발달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질은 더욱 나아졌을까? 젊은이들 상대로 '헬조선', 어떨까? 사회가 발전할 수록 우리도 더 잘 살게 됐을까? 오히려 빈부격차는 심화되고, 계층간 이동은 어려워 지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보력이 곧 권력이 되고, 경제력은 곧 부가 되면서 사회의 계급 시스템도 더욱 공고해졌다는 주장도 거세졌다.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 각각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들이 나란히 출간됐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유명한 스티븐 핑커의 '지금다시 계몽'(스티븐핑커 지음·김한영 옮김, 사이언스 북스 펴냄, 864쪽)이 서양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삶과 건강, 번영, 안전, 평화, 지식, 행복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라면 '존재권력'(브라이언 마수미 지음·최성희, 김지영 옮김, 갈무리 펴냄, 400쪽)은 테러경보, 감시 등을 통한 잠재적 위험이 곧 권력이 되는 권력 구조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소설 '관리자들'(이혁진 지음, 민음사 펴냄, 196쪽)은 책임지지 않는 사회의 부조리한 민낯을 한 인간의 세상을 통해 투영한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을까?'.. '지금 다시 계몽'=전면적인 핵전쟁, 자원고갈, 기후변화, 고삐풀린 인공지능은 어느순간 우리 지구를 끝장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함의 실체다. 하지만 이 것들이 정말로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까? '지금 다시 계몽'은 이렇게 인류의 공포감과 그로 인한 비관주의에 반대해 ,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세계는 좋아지고 있음을 여러 수치를 통해 보여준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의 논의를 확장한 핑커는 '지금 다시 계몽'을 통해 다양한 정부 기관과 국제 기구에서 생성된 데이터 집합을 바탕으로 우리 세상이 진보해 왔음을, 진보라는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핑커는 또 어떤 신학적 원리가 있어 세상이 목적론적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정반합 논리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진보가 필연적인 것은 아님도 함께 보여준다.
대신 지식을 인류의 복리와 안녕을 증진하는데 사용하자는 노력, 바로 계몽 주의의 이상에 따른 인간들의 작은 노력들이 진보를 이룩해 왔다고 주장한다.
핑커가 말하는 계몽은 선동자들이 즐겨 이용하는 인간 본성-부족 중심주의, 권위주의, 악마화, 마술적 사고에 반대하는 것으로 계몽주의의 모토는 '감히 알려고 하라'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다. '지금 다시 계몽'은 계몽주의의 핵심 이념을 재정의하는 1부 '계몽', 진보의 실재성과 그 실적을 데이터로 보여주는 2부 '진보', 핑커가 생각하는 계몽주의의 핵심 이념인 이성, 과학, 휴머니즘을 현대의 철학 사조와 정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새롭게 옹호하는 '이성, 과학, 휴머니즘'등 총 3부 23장으로 구성됐다.
▲#선제성이 #권력이 되는 시대...'존재권력'= 얼마전 미군이 철수한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접수는 허망할 정도로 일순간에 끝이 났다. 미군이 서서히 물러날 것이라는 예측과 어느정도는 아프카니스탄 정부가 버텨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아프가니스탄은 너무 쉽게 무릎을 꿇었다.
미군의 철수가 성급히 이뤄졌다는 비판이 커지고, 남한에서도 미군이 철수할 경우 아프카니스탄과 똑같한 상황이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도 쏟아져 나왔다는 점이다. 과연 그렇게 될까? 그럴수도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프가니스탄의 사례가 남한과 북한의 관계 양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이다. 탈레반에 대한 공포가 북한에 대한 공포의 확대에 이용되고, 어느순간 그 공포는 실재가 돼 현실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마로 마수미가 말하는 선제의 작동논리이자, 존재권력의 작동방식이다.
선제는 '선수를 쳐서 상대편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선제라는 개념은 시간 개념을 품고 있다. 마수미가 '존재권력'이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새로운 권력의 작동에서는 '선제'가 핵심이다. 존재권력은 '생명이 막 움직임을 시작해 아직 있는 듯 없는 상태로 존재가 되려는 찰나, 세상의 구멍에서 자신을 넌지시 암시하는 창발을 조장하고 방향짓는 권력'이다.
마수미는 요즘 유행하는 '팩트 체크'라는 말이 '일단 유포하고 보자'며 사실보다 '권력'이 더 중요하고 절실한 사람들로 인해 나왔다고 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권력의 '선제성'이다.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돼 있다. '선제 우선주의'를 통해 존재 권력의 탄생에서 부터, 국가 비상사태, 지각공격과 공포 등을 통해 존재 권력이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포'를 이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빌런과 #영웅의 시대..'관리자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된 '관리자들'은 회사로 대표되는 계급 사회와 그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다중적 욕망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공사 현장은 무에서 유를 일구어 내는 공간이자,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삶의 현장인 동시에 은폐와 카르텔로 얼룩진 불의의 현장이다. 도덕과 윤리가 고장난 죽음의 현장이기도 하다. '관리자들'은 이 공사에서 벌어진 참사를 통해 관리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힘의 의지와 힘에 기생하는 작은 인간들의 타협을 그려내고 있다.
책에서 관리자들은 원칙과 질서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중요한 그것을 위해 기꺼이 타인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위험에 빠진 타인을 외면하는 '빌런'이다.
반면 힘을 과시하고 있는 쪽에 붙어 힘의 조각이라도 묻혀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반대쪽에는 미련할 만큼 최선을 다하는 '작은 영웅'도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 흔한 빌런과 작은 영웅 사이, 평범한 동조자들이자 무심한 목격자들도 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선택을 한다.
회사의 건재함을 위해 희생되는 힘없는 사람들과 그들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상처하나 입지 않고 건재하는 조직을 통해 궁극의 관리자를 드러낸다. /오희룡 기자 hu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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