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된 과거의 시간만으로는 현실의 버거운 삶을 이기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거나, 어느순간 눈떠보니 거짓말처럼 스무살의 나의 모습이 됐다는 타임 슬랩의 상상은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매력적인 소재로 사용될 만큼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 속에서 해법은 이 매력적인 상상 뿐일까.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법을 그려낸 책들이 나란히 출간됐다.
'블루밍(정여울 지음, 민음사 펴냄, 272쪽)'이 ' 어린시절을 찬란하게 만들어준 명작소설과 동화를 작가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책이라면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비장애형제 자조모임 '나는' 글, 한울림스페셜, 288쪽)는 언제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던 장애인을 형제자매로 둔 비장애형제들의 이야기다. '대가없는 일(김혜지 지음, 민음사펴냄, 276쪽)은 삶에서 뒤쳐지고 휘청이는 이들을 그린다.
▲#소설 #동화 #나다운 삶=만약 다시 열일곱 살이 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이번에는 열심히 공부하라고, 아니면 못다한 효도를 해야 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까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보자고 해야 할까. '블루밍'은 정여울 작가가 열일곱 살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리고 그 시간을 지나 온 모두에게 보내는 따뜻한 인문학 편지다.
'빨간 머리 앤', '데미안', '인어공주', '작은 아씨들', '모모' 등 꼭 다시 읽어야야만 하는 책 25권을 선정해 많은 이들의 어린 시절을 설렘으로 빛내 줬던, 밤새 잠 못 이루게 했던 주인공들의 성장담을 이야기한다. 상상력의 세게를 심리학과 철학, 문학으로 종횡무진하는 그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성장의 비밀, 바로 나 자신으로서 행복해지는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이들 동화를 소개한 이유는 타인의 삶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 자신으로서 온전해 질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작가는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어른이 된다"며 책읽기와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책은 총 3부로 나눠져 있다. 1부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제제, '어린왕자'를 통해 이미 문제아로 낙인 찍힌 아이가 타인과의 우정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돼 가는 지를 말한다. 2부는 '미녀와 야수', '죄와벌'을 통해 이전과는 달라진 변화의 이야기를 담았다. 3부는 아픔과 후회를 겪으며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비장애형제라는 것 말고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이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한동안 사람들을 만나면 최대한 동생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해 봤어. 그랬더니 할 얘기가 없더라고. 비장애형제가 아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던 거야."
나 자신의 가치가 다른 존재에게 달려있다면 그 삶은 과연 나의 것일까? 태은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장애인 동생의 착한 언니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존재 가치라고 여겼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사랑받으려고 끊임없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가족의 요구에 맞추려고 노력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불쌍하게 느껴졌다. -'태은 나에게로 가는 길' 중에서
▲#사실은 #괜찮지 않은 #주변인=우리사회에서 비장애 형제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장애 가족의 이야기를 책이나 영화를 통해 접하기는 해도, 대부분이 장애인 당사자나 그 부모가 겪는 어려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어쩌다 등장하는 비장애인 형제는 존재감이 없거나, 장애인 형제에 대한 부모의 관심을 당연한 희생을 강요당한다. 아니면 장애형제의 존재감을 무작정 부정하는 '반항아'다.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는 발달장애 형제를 둔 비장애형제 여섯명이 쓴 소설형식의 자전적 에세이다. 소설속 비장애인 형제들은 '부모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이거나 '부모대신 형제의 병을 받아들이고 삶에 적응'하고, '엄마가 없을때는 엄마'가 될 정도로 좋은 누나이자, 동생이다. 책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족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 과정에서 비 장애형제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시기에 어떤 어려움과 혼란을 겪는지를 잘 드러낸다 가족안에서의 희생을 강요당하고, 고립된채 살아온 비장애인 형제들의 죄의식과 외로움, 혼란과 상처 등을 통해 우리 사회 가정의 역할과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알수 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의 어려움에 비해 멀어지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를 생각하면 종종 아득해진다. 또 이미 멀어져 버린 관계라 할지라도 기어이 기억의 조각들을 남기고야 만다는 것도. 의외로 기억의 밑바닥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건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다. 신문지를 깔고 앉아 언니가 내 앞머리를 잘라주던 밤에 부엌가위에서 나던 사각소리, 굴소스를 듬뿍 넣고 언니가 해 준 볶음밥을 먹던 오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던 노래, 내가 심한 몸살을 앓던 새벽에 물수건을 갈아주며 이마를 짚어보던 언니의 손길같은 것들.-'대가없는 일' 중에서
▲#신음과 #울음사이서 #침묵하기='대가 없는 일'은 '보통', '무난', '정상'과의 범주가 다른 사람들의 뒤처지는 걸음에 대해 얘기한다. 무엇보다 인플루엔서, 유튜브 등 지금 우리의 현실을 배경으로 결국은 뒤쳐지고야 만, 배신하거나 배신당하고만 우리의 내면을 엿보듯 그려낸다.
작가가 주목하는 인물은 '정상속도' 혹은 '정상인 상태'가 되고 싶은 이들과 남들이 말하는 정상보다는 '오롯한 나' 사이에서 휘청이는 인물들이다. 저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는 인물들의 울음이 터지는 순간, 혹은 침묵의 무게를 담담히 그려낸다. 무작정 침묵만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안전거리를 확보하지 않은채 자신을 발설하고, 상대를 공격하고 웅크리는 속내를 자세히 그린다. 그래서 공격한 자와 공격당한 자를 구분할수 없는, 배신과 고마움 사이의 기묘한 감정이 있는 것도 그 이유다. 각자의 속도대로 달리다 고꾸라진 이의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 주듯 살갑진 않지만, 따뜻한 작가의 시선을 느낄수 있다. /오희룡 기자 hu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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