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 말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모릅니다. 고3 여름방학을 앞두고 공무원 시험 공고가 나붙었지요. 어차피 대학은 못 갈 형편이니 연습 삼아 공부를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2학기 학교 공부가 남아 있고, 군필(軍畢) 가점이 있는 것도 아니니 합격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셨지요. 이 말에 어머니가 한 말씀 거든 것인데, 그 소리가 보약을 먹은 것처럼 힘을 주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다만, 어린 두 명의 동생과 한방을 쓰려니 늦게까지 공부하기가 불편했습니다. 다행히 담임이 자정까지 공부할 수 있게 교실 하나를 마련해 주셨지요. 한 달 남짓 자정까지 공부하고 돌아와 집에서 쪽잠을 자고, 일찍 일어나 다시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어머니가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순간, 울컥했지요.
"일환아! 틈틈이 공무원 시험공부를 해라! 청원경찰도 괜찮지만, 평생 할 건 아니지 않느냐."
"아닙니다. 우리 집이 비교적 넉넉해서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일반 공무원이 되면 승진도 하고 나처럼 과장도 되고 좋잖아?"
고양시 지역경제과장으로 일할 때, 청원경찰로 함께 일하던 젊은 직원이 있었습니다. 일산 신도시 개발로 보상받아 제법 잘사는 집안의 자녀인 그에게 청원경찰은 생계수단이 아니라 소일거리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저는 몇 차례에 걸쳐 계속 설득했습니다. 결국, 그는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힘들어하더군요. 저는 옆에서 자주 격려와 응원을 보냈습니다. 이듬해 합격했고, 그는 지금 6급이 돼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배 국장! 술은 씹어 먹는 게 아니잖아! 그냥 마셔."
"네, 알겠습니다. 마시겠습니다."
용인시 부시장으로 일할 때, 도시국 간부들과 저녁을 함께할 때였지요. 배명곤 국장이 전날 이를 뺐기 때문에 술을 안 마시겠다고 해 제가 농담 삼아 한마디 던졌는데, 그는 진담으로 듣고 술을 마셨습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덕분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했지요. 나중 제가 명예퇴직 후 경기관광공사 대표로 일할 때, 그를 저녁 자리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부시장님! 술을 씹어 드십니까? 어서 드세요."
이제는 용인시 부시장이 아니지만, 여전히 그렇게 부르면서 그가 한마디 던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날 오전 이를 뽑았기 때문에 술을 사양했는데, 제가 오래전에 했던 말이 고스란히 되돌아온 것이지요.
머리가 좋다고 인성이 좋은 건 아닌 듯합니다. 아무개 변호사가 김형석 교수의 문재인 정부 비판에 '이래서 오래 사는 것이 위험하다는 옛말이 생겨난 것일 게다. 어째서 지난 100년 동안 멀쩡한 정신으로 안 하던 짓을 탁해진 후에 시작하는 것인지 노화 현상이라면 딱한 일'이라고 해 논란이 일었지요. 그는 '적정한 나이는 80세 정도'라는 말도 했습니다. 아무리 진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고 자기보다 50살이나 많은 어른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지요. 그렇다면 자신도 80세가 되면 스스로 죽겠다는 것인지…. 박병석 국회의장을 향해 '개××'라는 욕설을 연상시키는 'GSGG'라고 표현해 한동안 시국을 시끄럽게 한 아무개 국회의원도 말이 독이 된 비슷한 예입니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라는 말이 있지요. '말은 사람의 인격'이라는 말도 있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말도 있습니다. 모두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말은 위로와 격려가 되고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남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을 많이 하려 애썼지만, 사소한 실수로 크게 곤혹을 치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인성이 부족한 탓이고 부끄러웠던 일이지요. 이순을 넘기면서 나름대로 한 번쯤 더 생각하고 말하리라 다짐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합니다. 말은 잘 쓰면 보약이지만, 잘 쓰지 못하면 독약이 된다는 것, 늘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할 금언(金言)입니다.
홍승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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