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경찰청 유동하 총경 |
미란다는 10년 전인 1966년 미국 연방대법원 '미란다 판결'의 피고인이었다. 그는 1963년 강도죄와 강간죄로 구속기소 됐고, 그중 '강간죄'만이 '미란다 판결'의 대상이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들락날락했었고 폭력적 성향의 인물이었다.
미란다가 살인사건을 저지르고도 무죄로 풀려난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분명히 1963년 3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교도소에 수감 됐고, 강간죄가 확정된 3년 뒤에나 '가석방'된 것이다.
그는 자기의 판결을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해 '미란다 원칙'을 엽서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유명한 원칙인데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할 때 '진술거부권 등'을 고지해 주는 절차를 말한다. 미란다가 죽은 후 몸을 수색해 보니 미란다 카드도 몇 장 나왔다.
살인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미란다, 모레노, 로드리 셋이 돈내기 카드를 쳤다. 로드리가 패하자 미란다에게 3달러를 주면서 지폐를 던져 날린 게 원인이다. 미란다는 화가 나 로드리를 흠씬 두들겨 팼다. 그 후 미란다는 손에 묻은 피를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미란다는 배와 가슴에 칼을 맞았다. 사마리아인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최초 현장 임장한 경찰관은 술집 종업원과 모레노, 로드리, 로드리 여자친구를 조사하고 로드리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조사보고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검사는 보고서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고 경찰은 최종적으로 모레노를 범인으로 판단하고 사건을 검찰로 넘겼다.
2월 3일 검찰은 모레노와 로드리를 살인죄로 기소한다. 체포영장은 발부됐지만 체포하지는 않았다. 수사과정에서 피의자들에게는 미란다 원칙을 천천히 끝까지 차분하게 읽었다. 피의자들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자백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 그들의 소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구미제가 돼 버렸다.
미국 수사기관의 미란다에 대한 소심한 앙갚음이었을까? 1966년 미란다 판결이 있은 후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FBI는 그 판결 이후 범죄가 급격히 증가했다고 발표했고, 경찰은 연방대법원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것처럼 홍보했다. 일부 법원은 미란다 원칙을 수용하기를 거부했고, 일부 주는 아예 미란다원칙과 다른 내용의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런 논란을 일으킨 미란다가 예쁘게 보였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한때 미란다 원칙은 미국 내에서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미란다 원칙이 헌법적 근거를 갖는 것이 아니라 법률적 근거라고 격하되기도 했다. 그러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미란다원칙은 살아남았고 전 세계에 퍼졌다.
미란다 원칙과 관련해 기억해야 할 인물은 미란다가 아니라 워렌 대법원장(재임 1953~1969)이다. 그는 보수파 공화당 집권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했다. 하지만 워렌은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리고 16년 동안 사법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의 길을 걸었다.
워렌 대법원의 가장 혁신적인 판결은 취임 이듬해인 1954년의 '브라운 판결'이었다. 당시 미국은 백인과 흑인이 같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는 인종 분리 정책을 펼쳤었다. 브라운 판결은 인종분리 정책을 위헌으로 판결했고, 이 판결에 미국 남부는 조직적으로 저항했고 대통령은 연방군(軍)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워렌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 성경 낭독은 위헌, 변호인 조력 없는 재판은 위헌, 진술거부권 등 고지 없는 체포는 위헌 등 혁신적인 판결들을 쏟아냈다.
이 글은 미란다 판결에 대한 사소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써본 글이다. 자못 궁금한 것은 저승에 간 미란다가 지금도 자랑스러워하고 있을까? 테스형은 알고 있겠지. /유동하 대전경찰청 총경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