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 중 한 장면. |
필자는 원광디지털대학의 동양학과에서 운명학을 강의하는 사람이다. 소위, 사주, 명리, 팔자 등의 단어로 알려져 있고, 동양의 신비학 정도로 호도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연구했다. 술수학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된 이 학문은 사실 고대로부터 상당한 철학적 문화적 유래를 가지고 있는 논리적 학문이다. 필자는 그 술수학의 현대적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술수학에 나타난 근본적 의미는 무엇일까에 관심을 가져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운명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고, 모르는 것, 죽음, 불행, 위험에 대하여 관찰하여 연구하고 알아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인간의 절박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운명'은 우리가 배우고 학습해온 '과학'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운명학의 신비적 측변이 강조되어왔고 그것이 운명학의 무거운 짐이다. 운명에 대한 관심은 인간의 원초적 절박함 때문이고, 그것은 고대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연의 주체적 의지와 미묘하게 연결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오징어게임 중 한 장면. |
현대에는 그 놀이가 '게임'이라는 단어로 하나의 거대한 콘텐츠가 되었다. 우리가 '게임'을 떠올릴 때 '진지함'과는 반대되는 요소로 인식하기 쉬운데 사실 그렇지 않다. 게임은 기본적으로 상당히 진지하고 심각하다. 또한 우리가 게임하는 광경을 생각하면 우스꽝스럽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게임이 표현되는 생각과 상황 때문일 뿐 게임 행위 자체는 그렇지 않다. 게임은 참이나 거짓, 선이나 악의 대립이 아니다. 게임은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제한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고유의 질서에 의해 규정된다. 그 과정에 긴장이 있고 평형과 전환이 있으며 대립과 결합 그리고 해체와 해결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게임에 매혹된다. 이것이 인생과 운명의 미묘한 단면이고, 오징어게임에 구체화된 시나리오이다.
이제 이 글의 주제인 게임과 운명의 미학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게임의 불확실성, 선택에 따른 축복 혹은 불행, 생존과 죽음 등은 인간 운명의 중요 요소이다. 사람들은 운수, 행복, 운 등의 관념에 성스러운 의미를 부여했다.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를 통해 신적인 힘이 작용된다고 믿었고, 오늘날 현대인이 무심코 길흉 판단의 점괘를 뽑아보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이어져 오는 실례이다. 아직도 우리는 판단을 내리기 곤란한 상황에서 제비뽑기나 동전 던지기의 방법에 의존하여 결정을 내리게 되며 그렇게 내려진 판정결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을 삼지 않는다. 게임은 그와 같은 것이다. 의외로 불확실한 전망을 실험해봄으로써 신의 뜻, 운명, 정의의 저울 등을 얻으려 한다. 서양에서도 정의, 디케라는 단어의 어원은 공정한 몫이나 손해 배상액을 의미했고 그것은 던지다 혹은 뽑다 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운명에 대해 두렵지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도전해야 하고, 승리에 도취할 때도 있고, 때로는 실패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인생이다. 인간은 인생이라는 강요되지 않은 게임을 하며 살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매 순간 누구나 인생을 건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종착점은 결국 죽음인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의 선택에 때로는 희열하고 때로는 오열하면서.
신정원 원광디지털대학 동양학과 학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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