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철웅 대전시 문화체육관광국장 |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혼이 들어 있다. 그래서 정인보 선생은 이 혼을 얼이라고 정의했다. 얼이 곧 민족정신이며 역사를 움직이는 본질이므로 얼을 고수하는 것이 곧 역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알파벳 출현은 불의 발견과 바퀴의 발명과 함께 서양인의 삶을 뒤바꾼 위대한 도약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에서 화약과 나침반 기술을 배워갔던 서양이 세계의 과학기술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동양인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알파벳을 발명하고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 왔기 때문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던 조선이 국권을 빼앗기고 민족정신이 흐려져 갈 때, 우리의 얼이 담긴 한글을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 한글날이다.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은 나라가 됐고, 우리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의 한자나 일본의 가나보다 컴퓨터 입력 속도가 7배나 빠른 한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워싱턴타임스 서울특파원을 지냈던 마이클 브린이 쓴 책(한국인을 말하다)에는 한국인조차 모르는 한국의 강점 25가지가 나오는데 세계에서 유일하게 문맹률이 1%인 나라(프랑스는 자국어를 쓰거나 읽지 못하는 국민이 25%),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 할 수 있는 나라(한글은 24개 문자로 1만 1천개, 일본은 300개, 중국은 400개)라는 자부심을 모르고 산다.
더욱이 누리소통방(SNS)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엠제트(MZ) 세대를 대상으로 국어능력을 조사한 결과 56.5%가 국어 능력 부족으로 나왔다. 이러한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언박싱(개봉기), 치팅데이(먹요일)와 같은 신조어는 제대로 알아듣기 어렵고 세대 간의 소통 문제, 문해력의 저하 등 사회적인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짬뽕(초마면, 뒤섞기), 유도리(융통)와 같은 일본 잔재어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시대적 상황으로 생성된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비말(침방울) 등과 같은 낯설고 새로운 용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언어란 시대적 변화와 표현의 자유 속에서 새로운 말들이 합해지고 분해되면서 다양하게 생성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신조어들을 모두 우리말로 바꾸어 사용하기는 힘든 과제이다. 다만 시민 언어생활에 영향력을 미치는 공공언어만이라도 쉬운 우리말과 올바른 한글을 사용하여 세대 간 의사소통이 단절되는 현상을 개선하고 공공언어의 한글 사용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부차원에서 우리말 사용 홍보의 노력으로 공공문서에는 안내서(브로슈어), 위험(리스크), 수요(니즈), 새활용(업사이클), 누리집(홈페이지) 등과 같이 개선된 행정용어들도 많다. 하지만 언어에도 관성이 있는지 익일(다음날), 수취인(받는 이), 고참(선임), 잔고(잔액) 등 습관처럼 쓰고 있는 고질적인 일본어 잔재들이 남아있다.
대전시에서는 시민들이 알기 쉬운 한글의 올바른 사용 확산과 공공언어 개선을 위하여 대전시와 산하 행정기관에서 통용되는 공공언어 실태조사를 추진한다. 불필요한 외국어 사용과 일본식 표현, 권위적인 어투, 어려운 전문용어 등 잘못 사용되고 있는 공공언어를 조사하여 쉬운 우리말 대체어를 알리고 개선하여 시민 누구나 공적인 정보에 있어 소외 없는 알 권리를 누리고 세대 간에 원활한 소통증진을 도모함으로써 국어진흥정책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으로 기대한다.
미래를 알려거든 지나간 일을 먼저 살펴보라 했다. 역사란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순간에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제575돌 한글날을 맞으며 한글의 고마움과 우수성을 되새겨 보는 이유다. /손철웅 대전시 문화체육관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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