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Y-zone 프로젝트: 3대 하천 재발견] 갑천유래비 머리 새기고, 가을의 전령들 가슴에 새기는 시간

[대전 Y-zone 프로젝트: 3대 하천 재발견] 갑천유래비 머리 새기고, 가을의 전령들 가슴에 새기는 시간

갑천④ [철학자들도 걷기예찬, Let's walk together]

  • 승인 2021-09-28 08:33
  • 수정 2021-09-28 09:07
  • 신문게재 2021-09-28 10면
  • 이해미 기자이해미 기자

컷-3대하천





니체의 명언처럼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우연히 만난 전민보 부근 갑천유래비 프로젝트의 상징

한 여름에서 가을로… 코스모스, 메뚜기까지 반겨주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 장 자크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명상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고 했다.

걸어야만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고 비로소 정제된 온전한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기에 걷기는 철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사색의 과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갑천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던가 곰곰이 떠올려 보면 오히려 걷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와 기사를 쓰다 보면 나도 몰랐던 기억들이 떠오르고, 그때 상황과 심정들을 글로 표현했다. 니체와 루소가 말했던 것처럼 걷기는 잡다한 생각들을 걸러 주는 여과지인 셈이다.  

 

갑천유래비
갑천을 걸으면서도 유래비를 지나칠뻔 했다. 네번째 걷기의 시작을 이곳에서 해서 다행이다. 갑천=이해미 기자
*갑천유래비, 놓칠 뻔했네
벌써 네 번째 갑천 걷기다. 이번 걷기는 구간을 미리 정해두고 시작했다. 세 번째 걷기가 끝났던 전민보에서 출발해 신구교까지다. 이전보다 긴 구간은 아니지만, 잘 알려진 아니 나에게는 처음 가는 보는 길이기에 어쩐지 지루한 구간이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보지도 않은 길을 '순례길'이 될 것 같다고 확신했으니 이 걷기는 시작부터 심호흡으로 마음을 고르고 다잡아 출발해야만 했다.



걷기를 시작하기 위해 전민보로 향하던 길, 지도에서 '갑천 유래비'를 스치듯 봤다. 다시 확인해보고, 검색을 해봤더니 진짜로 출발 지점에 갑천 유래비가 있었다. 갑천 유래비가 있다면 막연하게 갑천이 발원하는 상류지점에 있지 않을까 했는데, 갑천 중반부를 지나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 당혹스러웠다. 갑천 유래비가 있다는 것을 걷기가 끝난 후에 알았다면 나의 걷기는 그저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맹목적인 숙제에 불과했다고 스스로 자책했을 것만 같다.

가까스로 만난 갑천 유래비에는 '갑천의 발원지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 대둔산 자락의 한 골짜기다. 일백팔십 여리(70여㎞)를 뻗어 백번이나 굽이쳐 두계천과 합류하고 물이 하류로 흘러 다시 유성천을 껴안고 유등천 대전천의 물길을 모아 북쪽을 향해 금강으로 흘러간다. 이같이 수만 년을 굽이쳐 흘러내린 대전의 젖줄 갑천은 이름과 같이 으뜸이고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대전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하천이다'라고 쓰여있다.

갑천이 어디에서 시작해 금강으로 가는지 모르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갑천 유래비를 만난 것은 대전 Y-zone 프로젝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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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령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파란 하늘에 살랑살랑 꽃이 핀 갑천길로 자전거 라이딩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았다. 보기만 해도 여름은 갔고, 가을이 왔음이 느껴진다. 갑천=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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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를 하는 시민들. 어쩐지 이 모습을 보는데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떠오르는 것은 왜인지. 물결치며 흘러가는 하천이 반짝인다. 갑천=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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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보에서 신구교 구간은 정겨운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다. 날이 좋아서 그런가 자전거를 타는 가족과 시민들이 유난히 많았다. 갑천=이해미 기자
*어느새 여름은 가고, 가을이 성큼 왔구나
갑천 유래비를 보고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를 처음 기획할 때는 폭염이 시작됐던 한여름이었다. 한낮을 피해서 새벽, 혹은 밤 걷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첫 번째 걷기가 끝난 뒤부터 절정이었던 더위는 고맙게도 한풀 꺾였다. 추석이 지났으니 우리의 계절은 완연한 가을 속으로 진입했다.

갑천도 어느새 가을로 가득했다. 코스모스가 피었고, 매미가 울던 나무 사이로는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메뚜기, 사마귀가 예고도 없이 불쑥 튀어나와 여러 번 놀랐다. 곤충들이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는 모습은 참 대견하고 신비하다. 길에서 만난 메뚜기나 사마귀는 똑같은 색을 지닌 녀석들이 하나 없다. 숨을 곳을 찾아서, 사냥을 위해 은둔하기 위해 보호색을 타고난 듯했다. 그래서 돌멩이인가 하고 보면 메뚜기고, 나뭇가지인가 하면 사마귀고.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가을 곤충들 앞에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가을은 무엇보다 높고 파란 하늘이 아니겠는가. 갑천 물길과 데칼코마니처럼 이날 하늘은 완벽하게 좋았다. 날씨 예보에는 구름 낀 하늘이라고 했는데, 구름마저도 가을바람이 쓸고 간 듯 예술적인 흔적을 남겼다. 걷느라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고 무거워졌지만 하늘 한 번 바라보고 흘러가는 갑천 한 번 바라보니, 일요일 한낮의 시간이 한적한 이 시간이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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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사진을 이렇게 잘 찍어줘도 될까? 무심코 셔터를 눌렀는데,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제대로 찍혔다. 갑천=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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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아서 걸으면서도 자꾸만 사진을 찍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때 가장 아름다운데, 날씨마저 좋으니 이건 뭐 환상의 콜라보다. 갑천=이해미 기자
*순례길 아니죠. 혼자 걷기 가장 좋은 코스
가보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었는데, 왜 네 번째 길은 재미없는 순례길이 될 거라고 판단했을까 후회가 든다. 가보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멋질 거라고 상상하는 긍정적 사고가 필요한데, 좋은 길을 걸으면서도 좋은 생각을 끌어내지 못했다.

순례길이라 될 거라고 예측했던 전민보~신구교 구간은 사실 그동안 걸었던 갑천 구간 중 가장 좋았던 코스였다. 무엇이 좋았냐고 물어본다면 그냥 한적한 시골길을 걷듯 포근했고, 지루해질 때마다 갑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고, 문득문득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혼자 걷고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지던 건물이 어느새 눈앞에 와 있고, 단조롭던 풍경은 시시때때로 바뀌니 이 또한 플러스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축구, 야구, 파크골프, 캠핑, 낚시 등 이 구간에는 유독 넓은 하천 대지가 많아서 운동 시설이 다양했다. 그 중 파크골프는 완벽한 경기장 형태로 조성돼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는 소음보다는 일상의 온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직선, 곡선, 산책로, 작은 교각 등 이 길은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아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저 멀리 목표지점인 신구교가 보일 때쯤엔 좀 더 걸어볼까 싶었지만, 마지막 갑천 이야기를 위해서 아껴둬야 했다.

전민보~신구교 구간은 앞선 구간처럼 시야를 압도하는 건축물 하나 없다. 그럼에도 걸으면서 혼잣말로 '좋다'를 되뇌이게 되는 건 가을 갑천의 에너지가 아닐까.

갑천 다섯 번째 이야기는 불무교에서 갑천과 금강이 ‘Y존’으로 만나는 마지막 구간이다.
갑천=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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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라이브기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촬영하고 편집해 분신술 컷을 만들어 봤다. 걷는 모습이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보니 새로운 시도라도 해보는 거다. 갑천=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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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로 찍어본 풍경. 탁 트인 가을 하늘 아래 조용한 갑천길은 최상의 선물처럼 기분 좋았다. 갑천=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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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보에서 신구교까지는 6.17km, 시간은 1시간 25분이다. 애정하는 볼록거울 컷으로 네번째 걷기 끝~ 갑천=이해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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