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누군가를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게 존재하는 일들도 있다. '제복 입은 하인', '직업인으로서의 깡패',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들이다.
1930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주당 15시간 노동여건을 달성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생산의 자동화는 인류에게 여가 시간을 주는 대신 '가짜 일일'을 하는 불쉿잡을 양산했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 비해 여전히 수준 미달의 대우를 받는 필수 노동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기술이 진화할수록 공고화되는 인류의 계급과 견고해지는 집단의 벽안에서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의 정의에 부합하며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을 가장 사실적으로 분석한 책 두 권이 나란히 출간됐다.
인간의 기만과 허위의식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불쉿잡'(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김병화 옮김, 민음사 펴냄, 512쪽)이 비판적 현실을 바탕으로 '기본 소득'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면 '콜카타의 세사람'(메가 마르다르 지음, 이수영 옮김, 북하우스 펴냄, 360쪽)은 기차 테러 사건에 우연히 휘말린 세사람을 통해 사회적 계급 이동을 절박하게 소망한 인류에 '지극히' 현실적인 결말을 제시한다.
▲왜 무의미한 일자리는 계속 유지될까? '불쉿 잡' = 백화점에서 유니폼을 입은 직원을 꿇어 앉히고 갑질을 행사하는 뉴스가 종종 보도된다. 갑질 사례가 보도되고, 천박한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해도 백화점은 끊임없이 손님을 등급을 매기고 각각의 등급에 맞춰 유니폼 입은 직원들을 배치한다.
주먹과 폭력이 삶의 전부인 깡패들에게 위계질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의 '형님'의 '형님'의 '큰 형님'의 '왕형님'의 '어르신'의 정점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사회에 그렇게나 많은 존재가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기술이 발달하면 노동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다르게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하찮고, 쓸데없는 일들이 계속 생겨난다.
'쓸모없는', '엉터리,' '쓰레기 같은' 등의 의미를 지닌 비속어인 불쉿(Bullshit)에서 파생된 불쉿잡은 "종사자조차도 그것이 존재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직업"을 말한다.
실제로 책에서는 '영국인의 3분의 1이 자기 직업이 세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네덜란드인의 40%가 자기 업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답했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이처럼 쓸데없는 불쉿직업을 다섯 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상사나 관리자를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제복입은 하인', 타인을 공격하는 요소가 있으며 누군가가 채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직업인 '깡패', 문제를 덕트테이프같은 임시방편으로 때우는 업무만 하는 '임시 땜질꾼', 실제 목표를 이루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서류를 양산하는 형식적 서류 작성 직원', 그리고 이런 불쉿 업무를 만들어 배분하는 중간 관리자 '작업 반장'이다.
문제는 코로나 팬더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닥뜨린 지금이다. 이 비상 상황에서 진짜로 사회에 필수적인 일이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불쉽잡은 끊임없이 느는 대신 타인을 이롭게 하는 노동일수록 보수는 왜 적어지는가에 대한 성찰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한 해법은 '보편적 기본소득'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 운동이 기본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생계와 노동을 분리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의 가치, 시간의 가치를 임금의 값으로만 환산하지 않을 수 있다면, 비로소 인간의 자유와 실천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밖을, 자기 나라의 들판을 내다본다. 창밖에 마음을 달래주는 녹색이 펼쳐진다. 논과 야자나무, 전원지대의 끝없는 녹색, 아, 환상! 사실 그들은 추한 교외 지역을 보고 있다.-'콜카타의 세사람' 중
▲나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자리에 서있을까? '콜카타의 세사람' =성공에 관한 정의는 각자 다르지만, 누구나 성공을 꿈꾼다. 성공을 하면 보다 나은 삶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콜카타의 세사람'은 기차 테러 사건에 우연히 휘말려 체포된 젊은 여성과 그 여성의 결백을 증명할 유일한 증인인 배우 지망생, 테러 사건 재판과 여론을 발판삼아 정당 정치에 뛰어든 중년 남성을 통해 집단에 의해 가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 과정에서 집단의 광기와 여론 재판, 각자의 욕망과 선택의 결과는 현실적이다.
'경찰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돕지 않는다면, 죽는 모습을 지켜만 본다면, 정부 역시 테러리스트라는 뜻 아닌가요?'라고 페이스북에 올린 짤막한 코멘트로 테러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젊은 여성. 마녀 사냥과도 같은 여론 재판은 이 젊은 여성은 이미 테러용의자다.
광기처럼 들끓는 여론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결백을 증언하는 것은 인생을 걸 만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녀를 본적도 없는 중년의 남자는 단지 그녀가 자신이 몸담은 학교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그녀가 충분히 테러를 저지를 법한 인물이라는 암시'만 하면 인생의 한계단을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진실을 은폐하고 희생양을 찾는 정치권과 사법체계,포퓰리즘 정치와 가짜뉴스, 언론 재판 등 현대 사회의 온갖 부조리한 시스템을 한곳에 모아놓은 책 속 세계는 현실의 축소판이다.
진범은 사라지고 희생자만 남은 사건을 세사람의 인생을 통해 생생하면서도 무심하게 써나가고 있는 소설은 그래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곳인지, 그리고 이 세계에서 내가 끝끝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오희룡 기자 hu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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