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룡 소장 |
우선 대전천을 돌이켜 보기로 했다. 사실 대전천은 초등학교, 중학교 등 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모두 담고 있는 정겨운 하천이다. 지금은 우리 고장에 갑천, 유등천, 대전천이 흐르고 있다고 인지하다. 하지만 삼성초등학교, 한밭중학교를 다녔던 그 당시에는 대전천만 알고 있었다.
대전천은 당시 우리 고장에서 잘 나가던 동네를 흐르고 있는 부자 하천이었다. 지금은 규모가 줄어든 삼성시장인 ‘깡시장’과 어른들도 신기해하던 그레이하운도 이층버스가 지나던 정류장, 인근에서 일간신문을 팔던 할아버지, 이분을 벤치마킹하여 초등학교 시절 역전에서 신문판매로 용돈을 벌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용돈은 역전 건너편에 있던 뉴욕제과 인근 오락실에 모조리 갖다 주었다.
대전천과 유등천이 합류하는 삼천교에서 목척교 방향으로 걸어보았다. 예전에는 ‘열두공굴이라고 불렸던 하천을 따라 지금은 기차가 안 다니는 철교 밑은 지나서 만나는 현암교는 시내로 나가던 통로였다. 현재는 하상도로, 산책로, 자전거도로가 혼재돼 있어 안전사고도 우려되는 하천담당자로서 안타까운 구간이다. 그 다리를 지나면 삼선교가 나온다. 보문고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삼선교 아래는 당시에는 모래 바닥이었다. 따라서 보문고뿐만 아니라, 한밭중, 대전여상 학생들이 방과 후 이곳에 모여 힘도 겨루고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다. 때로는 삼선교에서 뛰어내리는 과시를 대전여상 누나들에게 보여주면서 놀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녀석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그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삼선교를 지나면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한때는 위풍당당한 빌라맨션이 있었고 그곳에는 지금 못지않게 유명한 국민가수 나훈아, 영화배우 김지미 씨가 거주했고 우리는 친구들과 호기심에 몇 번씩 그 주변을 맴돌곤 했었다. 사실 두 분보다는 그분들 딸인 '밍크'가 우리 또래라고 하여 더욱 신비스럽게 생각했던 곳이기도 하다.
근처 제일학원에서는 아직도 정겨운 곰보빵을 나눠주기도 했고 원장님이 효성학원 원장님과 형제라고 들었다. "나뭇가지가 바람 자기를 원하나 바람은 자주질 않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시지 않네"라는 공자님 말씀을 외우게도 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학원이었다.
선화교를 걷노라면 우리 고장의 최고의 인쇄거리가 나온다. 근처를 지나면 진한 잉크 냄새가 코를 찌르고 손목에는 헝겊으로 만든 토시를 한 아저씨, 누님들이 활자판에 영혼을 바치던 거리다. 중도극장과 신도극장에서는 2편 영화를 동시 상영했고 그 두 극장은 라이벌이었다.
목척교 중앙데파트, 홍명상가는 당시를 살았던 대전시민이라면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쇼핑센터이면서 안식처였고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87년 민주화 항쟁 시 많은 시민이 민주주의를 갈망하면서 목 놓아 외쳤던 그러한 민주주의 성지였다. 그 한구석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꿈돌이 동산 벤치는 가난하지만 서로를 아끼던 연인들, 친구들이 약속장소로 선호했고 하천변 난간에는 직장인들이 퇴근하면서 가스 불빛 아래에서 홍합 국물로 소주 한잔을 털어놓던 포장마차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게 하던 곳이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중부권 최대의 시장이면서 대전 시민들의 먹거리와 생필품을 제공하던 중앙시장이 지금도 업그레이드하면서 정착했고 꽃씨와 묘목들을 팔던 중교다리 사이에 다리가 2개나 더 만들어졌다. 인창교를 지나면서 번창했던 쌀시장, 동화극장이 말없이 대전천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래도 이런 것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전천은 오늘도 묵묵히 흘러간다. 원고를 다 채우고는 보문교 위로 올라가서 단골 순댓집에서 순대 국수와 막걸리 반 되로 마무리한다. /주황룡 대전시 하천관리사업소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