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등천 전시장, 민간관리로는 한계…폭우 때 작품 400점 유실되기도
위치, 규모 완벽한 축구장은 비둘기만 머무는 곳으로 전락
유등천변(태평교 부근)의 하늘과 땅의 색감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
여름 끝자락에서 다시 찾은 유등천은 변함없이 초록빛과 천 내음을 머금은 채 반겨주었다.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해보니 어느새 매미 소리가 그쳤다. 그렇게 밤낮 잠을 깨우는 소란스런 말썽꾸러기지만, 겨울이 되면 또 생각날 것이다. 이번에는 중구 태평교를 시작으로 유등천을 타고 갑천 방향으로 올라오는 코스를 따랐고, 그동안 중촌동, 태평동, 유천동 방향의 천변을 걸었다면 이번에는 서구 가장동, 용문동 방향의 천변을 걸어봤다. 그동안 수도 없이 찾았던 유등천이지만, 이날 찾은 유등천(태평교 부근)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모습이었다. 적당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만으로 그간 쌓인 회포를 풀기에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아직 낮에는 햇살이 뜨거워 조금 걸었는데도 등에는 땀 줄기가 흘렀다. 그동안 쌓인 지방들도 겸사겸사 빠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걸음 속도를 조금씩 높여갔다. 자연이 싱그러운 탓인지, 천변 곳곳에는 온갖 벌레들이 모여있어 산책하더라도 선글라스는 필수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눈에 벌레가 들어가 곤욕을 치르곤 했는데, 매번 손으로 "저리 가라"고 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가끔은 물이 흐르는 소리에도 마음 속이 정화되기도 한다. 유등천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
태평교부터 수침교까지 이어지는 하상도로 한 켠에는 시민들 만의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진은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
#서예 작품, 그림, 명언 글귀까지… 유등천은 자연 미술관
사실 이번 유등천 걷기의 주요 테마는 '곳곳에 숨어있는 문화공간 알리기'였다. 태평교에서 가장교까지 서성거리듯 걷다 하상도로 한쪽에는 시민들이 제작하고 관리하는 전시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태평교부터 시작해 수침교까지 1.8㎞가량 이어지는데 알고 보니 전시장 길이로는 세계 최장을 자랑하고, 전시된 작품만 3000여 점에 달한다고 한다. 가장교에서부터 걸음 속도를 늦춰 작품 하나하나씩 보거나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거리에 있는 작품들이 마음속 큰 위안이 되리라 생각지 못했다. 순간마다 깊이 새겨지는 특별한 글귀들은 하나둘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대부분 들어보거나 알고 있던 글귀였지만, 어느새 이런 작은 위로도 잊은 채 달려오고 있었다. '복잡하게 살지 말라, 단순하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사연 없는 사람 없고, 아픔 없는 사람 없다. 힘들거든 쉬어서 가자' 등 수많은 글귀가 작은 속삭임들로 다가왔다.
태평교부터 수침교까지 이어지는 하상도로 한 켠에는 시민들 만의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진은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
"출가를 하겠다고 부모를 설득할 때 감정의 동요 생기지 않으면 그날로 아사리 의식(삭발)을 하면 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비록 그 관문을 넘지 못했지만, 유등천의 글귀를 보면서 위로를 받은 탓인지 어느새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고 말았다. 문화의 존재 요소는 그런 것이다. 닿는 이로 하여금 사색의 기회를 주는 것.
태평교부터 수침교까지 이어지는 하상도로 한 켠에는 시민들 만의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다. 사진은 가장교 부근 신가람 기자 shin9692@ |
유등천 전시장을 살리기 위한 민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시민들의 후원을 통해 관리하지만, 결국 지자체의 참여 없이는 기존의 상태로밖에 머물 수 없다는 게 개인적인 판단이다. 특히 민간 관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 보니 2020년 극심한 폭우 때는 하천이 잠겨 400여 점의 시민 예술품이 유실되는 안타까운 일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미 시민이 직접 품고 있는 '유등천 전시장'이 충분한 규모와 공간까지 마련했으니 지자체의 관심을 통해 새로운 문화사업으로 재탄생하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주말을 맞아 시민들이 유등천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
깔끔하게 관리된 게이트볼 장(수침교)에서 어르신들이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
유등천 전시장을 천천히 전부 둘러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버렸다. 수침교 끝까지 둘러보고 나서야 다리가 아프다는 걸 인지했고,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멀리 수침교 건너편에는 어르신들이 게이트볼장에서 볼을 치며 문화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야외 스포츠가 제격이긴 하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탓에 5분도 채 쉬지 않고 게이트볼장 근처로 가 구경을 시작했다. 수침교 바로 밑에 있는 게이트볼장은 잔디 정리까지 됐는지 깔끔히 정돈됐고 어르신들도 보란 듯이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축구인의 입장인지 직업적 소명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교 근처에서 본 축구장을 대비하게 됐다. 양쪽에 골대가 설치돼있어 누가 봐도 축구장인지 알 수 있고, 규모를 보더라도 정식 축구장 크기와 비슷해 보였다.
문제는 위치와 규모 등이 완벽한 축구장임에도 불구하고 잔디 관리를 포함해 운영 시스템이 전혀 없으니 비둘기만 머무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수익률 배분을 시나 시 체육회와 협의하고 기본적인 관리권을 지역축구협회나 민간에게 넘긴다면 주마다 청년들로 가득 찬 전문 축구장으로 재탄생해있을 텐데 이런 걸 보면 매번 속이 탈 수밖에 없다.
게이트볼장과는 반대로 가장교 바로 밑의 축구장은 관리가 되지 않아 곳곳에 비둘기만 가득차 있다. 신가람 기자 shin9692@ |
그동안 유등천의 낯익은 모습들을 담았다면 이날엔 유등천의 새로운 모습까지 속속 들여다봤다. 문화로 답을 찾기도 했지만, 워낙 심취할 수 있는 곳들이라 "더 알려질 수 있는 곳일 텐데…"하며 곳곳에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긴 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성찰의 계기가 된 건 자신이었다. 문득 과거에 젖고 말았지만, 가끔 이런 시간 여행은 내일을 다시 열심히 살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삶에 대한 존중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화란 힘을 주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 아닐까.
유등천=신가람 기자 shin9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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