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 오피니언
  • 여론광장

[수필 톡]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남상선 / 수필가, 전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21-09-10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산은 녯 산이로되 물은 녯 물 안이로다.

주야(晝夜)에 흘은이 녯 물리 이실쏜야

인걸도 물과 갓도다 가고 안이 오노매라. -황진이

아내와 산책하던 도솔산 오솔길을 걷노라니 황진이 시조가 떠올랐다. 다니던 길은 그대로인데 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서인 듯했다. 전에 있던 소나무, 갈참나무, 아가위나무, 산초나무, 상수리?도토리나무도 옛 모습은 변한 것이 별로 없는데 내 또 다른 그림자가 보이지 않아 그런 거 같았다.



'땀나면 수업 못한다'고 출근할 때 내가 질 가방을 메고 따라오던 아내 모습이 눈에 밟혔다. 여기는 전에 내가 유성고 출근할 때 거쳐야 하는 월평상수도 본부 울타리 옆길 중간지점이다. 아내가 도솔산 정상으로 가는 분기점이 되기도 한다. 이 곳이 바로 가방을 질 주인공이 바뀌는 지점인 셈이다. 아내가 메었던 가방이 내 등으로 자리바꿈하는 순간 아내는 도솔산 정상으로, 나는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을 달리 했다. 어쩌면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이라는 유행가 가사를 방불케 하는 곳이고도 했다.

내 그림자가 생각나면 이따금씩 걷는 길인데 오늘 따라 왜 이리 힘들게 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여러 세월 같이했던 아내와의 추억이 물씬 묻어 숨 쉬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당신 가방은 내가 질게요. '

환청이지만 그 다소곳한 목소리는 지금도 솔바람을 타고 나를 울리고 있었다.

순간 주마등같이 스쳐가는 아내와의 과거사 이런 일 저런 일이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있었다.

약혼식 끝나고 향천사 오솔길 걷던 추억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설레는 가슴으로 처음 잡아 본 아내의 손목 체온도 느끼는 순간이었다. 두근거렸던 떨림이 못 잊는 그리움인지 아쉬움인지 어쩌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연상의 회상이 복잡하게 뒤얽히고 있었다. 7남매의 장남 아내로 고생만 시켰던 한의 세월이 나를 울리고 있었다. 여름에도 집 비워 달라는 주인의 말에 이삿짐 싸던 아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집 없는 설움으로 내 집 갖기까지 31번이나 이삿짐 쌌던 아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많은 책을 박스에 담아 묶느라 땀 흘리던 아내의 힘겨운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가정 평화를 위해 바가지 한 번 긁지 않던 모나리자 미소의 얼굴이 나를 어렵게 하고 있었다.

가난 속의 신혼살림에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밝은 표정만 지었던, 또 다른 내 그림자가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좋은 옷, 별난 음식, 꽃 한 송이 챙겨주지 못했던 바보 남편의 지난 세월이 원망스러웠다.

예쁜 얼굴 분칠하고 바를 화장품 한 가지 챙기지 못했던 모자란 지아비 -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모든 걸 놓치고, 보내고, 만시지탄(晩時之歎)의 한숨으로 힘들어하는 바보가 미워졌다. 넋두리 신세가 돼서야,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자신이 왜 그리 미워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푸념 같은 넋두리 한을 몇 자 얽어 아내에게 바치고자 한다.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7남매의 장남아내 지는 짐만 덜어줬어도

보내는 맘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텐데



집 없는 이의 설움 조금만 갖게 했어도

울컥하는 마음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31번씩이나 이삿짐 싸는 일 없었어도

이렇게 미어지는 마음은 아녔을 텐데



좋은 음식 원 없이 한 번 먹게 했어도

보내는 맘 이리 무겁진 않았을 텐데



평생 한과 고달픔으로 맥질한 아내가

얼룩진 마음으로 못 올 길을 가다니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아들딸 뒷바라지에 손발이 다 닳더니

짝짓는 날 그걸 못 보고 그냥 갔어요.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당신한테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고생만 시키고 마냥 그냥 보내다니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당신 없으면 나 못 사는 줄 알면서도

며느리 사위 보지도 못하고 보내다니

이것만은 안 돼요, 안 돼,



천만겁 다해도 내 반쪽인 임아, 내 여인아,

하늘과 땅 사이가 멀고멀어 마음뿐이니

천국에서나 편히 쉬고 영면하소서.



남상선
남상선 / 수필가, 전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취임 100일 인터뷰] 황창선 대전경찰청장 "대전도 경무관급 서장 필요…신종범죄 강력 대응할 것"
  2.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5.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1. 경무관급 경찰서 없는 대전…치안 수요 증가 유성에 지정 필요
  2.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3.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4. 세종시 50대 공직자 잇따라 실신...연말 과로 추정
  5.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중부권 최대 규모 크리스마스 연출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