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경찰청 유동하 총경 |
이 만화 덕분이었을까? 이후 유사한 제목으로 연극과 영화 그리고 일일 드라마까지 만들어진다. 그런데 위 만화는 '음란성' 지적으로 연재가 중단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상품화하고,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데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언론은 음란성만 지적하기에 바빴다.
그 만화의 영향이었을까? 이 무렵 대전과 충청을 무대로 악행을 일삼는 속칭, ‘발바리’들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중 대표주자가 대전의 '원조' 발바리다.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류' 발바리들인데 그 이유는 그가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횟수의 범행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발바리는 1992년부터 대전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범행을 시작했다.
1998년 초에는 피해자들이 발바리라 주장해 무고(無故)한 사람이 체포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구금된 중에 발바리 사건이 나고서야 무구(無垢)한 그는 석방된다. 이때가 처음으로 유전자가 분석된 사건이다.
그런 와중에 필자는 2004년 11월 동부서 형사계장으로 부임한다. 당시 대전에는 3대 미제사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발바리 사건'이었다. 이미 그놈만 잡으면 형사 1개 반을 모두 특진시켜 주겠다는 지휘관도 여럿 있었다. 광수대 1개팀은 기이 전종 수사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2005년 1월 초 근무하는 기간에 '나의' 관할을 공식적으로 다녀간 것이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잡기 위해 자료를 대조하며 밤을 새우던 날도 여러 날이었다. 힘들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정확히 1년만인 이듬해 정초, 우리는 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형사팀이 용의점을 확인하러 그의 집에 간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얼굴을 비추고 양말을 신고 나온다던 발바리는 창문을 타고 도망갔다. 이때부터 추격극이 시작된다.
도주 3일째 되는날, 지역의 한 신문사 기자가 먼저 냄새를 맡았다. 1면에 '발바리 꼬리 밟혔다'고 기사화했고, 사회면에는 2꼭지나 더 실었다. 그 다음 날부터는 각 언론에 도배됐다. 그는 도주 10일 만에 서울의 한 피시방에서 검거된다. 검거된 날 밤, 우리 경찰서의 앞마당은 낮보다 환하게 불빛이 켜졌다.
이외에도 우리팀은 전국 무대 3인조 납치강도단(27건)과 2인조 생활정보지 이용 강도단(27건)을 검거하기도 했다. 둔산서로 전근 가서는 7년간 검거 안 됐던 경상도 발바리(15건)를 검거했고, 천안으로 가서는 수년 간 검거가 안 된 윗층에 물이 샌다는 사건도 해결했다. 필자 생각이지만 발바리보다 백배 천배 더 나쁜 아류 발바리도 있었다.
그렇게 대전과 충청권에서 대략 40여 명의 발바리는 우리 형사들이 열정과 헌신으로 모두 소탕했다. 광주와 대전을 오가는 광주발바리도 몇 해 전 수감 중에 검거됐다. 발바리가 사라지고 나니 세상이 조용해졌을까? 일부 발바리는 범행을 중단하기도 했으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전에는 형사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사건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바로 '바바리맨'이나 '슴만튀' 사건이다. 하지만 그것도 최근에는 거의 평정된 게 아닐까 싶다. 이제는 성희롱이나 성매매가 강력사건으로 분류될 날도 올지 모르겠다.
사실 발바리 소탕은 과학수사의 발전 덕분이었다. 영국에서 80년대 초 유전자를 과학수사에 접목했고, 우리는 97년경 도입했다. 이제는 발바리들이 출소하더라도 과거와 같이 다수의 범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산에 가을비가 추적추적. 커피 한 잔에 음악이 흐른다. 채은옥의 '빗물'.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 주듯이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날이 생각이 나네.
옷깃을 세워 주면서 우산을 받쳐 준 사람 오늘도 잊지 못하고 빗속을 혼자서 가네. 경찰관들이여 자기만의 추억 만들기 어떠한가?
대전경찰청 유동하 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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