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공직자로 살면서 승진을 하거나 자리를 이동했을 때 부보님 산소를 찾아 인사올리곤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산소엘 가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도와주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부모님은 그리 많지 않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6남매를 키우시느라 눈물겨운 삶을 사시다가 고생만하고 돌아가신 정말 불쌍한 분입니다. 땅까지 팔아가며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신 눈물겨운 삶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지요. 여섯의 자식들은 공부를 잘했는데 부모님은 그것이 걱정거리였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학교에 안보내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때만 해도 우리보다도 훨씬 잘사는 집안에서도 몇 집을 빼곤 중학교만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자식들 때문에 남보다 더 고생을 한 셈이지요.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니 땅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을 우연히 들은 일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공부 잘하는 게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공부를 시키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말로 들리니 마음이 울컥하더군요. 그런 부모님이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못하시면서 그야말로 눈물겨운 질곡의 삶을 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훗날 저와 형 그리고 둘째 여동생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형편이 나아지자 신작로 삼거리에서 오고가는 공무원들을 붙잡고 술을 사주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는 드물게 자식 셋이 공무원으로 일하니 자랑스러웠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변변한 양복 한번 제대로 못 사 입으셨습니다. 회갑잔치 직후, 제가 모셨던 지사님께서 양복티켓을 회갑선물로 주셔서 서울까지 올라가 양복을 맞춰 입게 됐지요. 아버지는 너무 좋고 귀한 옷이라며 명절에나 입으신 후 장롱에 모셔두곤 했는데 결국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동네에서 유명한 술꾼이셨던 아버지는 인정도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시는 보기 드문 시골 멋쟁이셨지요. 술 한 잔 걸치고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들고 올 때면 이미자의 '황포돛대'나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멋들어지게 부르곤 했습니다.
벌초는 단순히 풀을 깎고 잡초를 뽑는 일이 아니지요. 어르신들의 힘겨웠던 삶을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세우는 일입니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서는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 돌아설 줄 몰랐습니다. 가끔 그리도 절절히 뵙고 싶을 때가 있는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나 하늘나라로 가신 지금이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크나 큰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언제나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벌초를 마치고 헛헛한 마음으로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 왔지요. 이번 추석에는 산소를 찾아 아버지의 애창곡을 정성을 다해 불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꾸 생각이 많아지고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걸 보면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 중인가 봅니다.
홍승표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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