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산소는 마음의 쉼터입니다

  • 오피니언
  • 여론광장

[기고] 산소는 마음의 쉼터입니다

홍승표 / 시인

  • 승인 2021-09-03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처서(處暑)가 지나고 소슬바람이 제법 시원하고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은 날, 벌초를 다녀왔습니다. 연례행사처럼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매년 느끼는 감정은 다르게 다가오지요. 벌초를 한다고 해서 조상님들이 알아주는 것은 아닙니다. 벌초를 하는 것은 추석 성묘를 할 때나 시제(時祭)를 지낼 때 마음이 홀가분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님을 잘 모신다는 마음의 위안을 삼기 위함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정말 열심히 비지땀을 흘려가며 풀을 깎고 잡초를 뽑고 또 뽑았지요. 화장납골문화가 확산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산소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산소는 돌아가신 분(亡者)의 휴식처이기도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저에게 있어서도 마음의 쉼터가 되기 때문이지요.

오랫동안 공직자로 살면서 승진을 하거나 자리를 이동했을 때 부보님 산소를 찾아 인사올리곤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산소엘 가서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막혔던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마음이 편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도와주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지요. 부모님은 그리 많지 않은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6남매를 키우시느라 눈물겨운 삶을 사시다가 고생만하고 돌아가신 정말 불쌍한 분입니다. 땅까지 팔아가며 6남매를 키우고 공부시키신 눈물겨운 삶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지요. 여섯의 자식들은 공부를 잘했는데 부모님은 그것이 걱정거리였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학교에 안보내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때만 해도 우리보다도 훨씬 잘사는 집안에서도 몇 집을 빼곤 중학교만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자식들 때문에 남보다 더 고생을 한 셈이지요.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니 땅을 팔아서라도 공부를 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는 말씀을 우연히 들은 일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공부 잘하는 게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에 공부를 시키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말로 들리니 마음이 울컥하더군요. 그런 부모님이 먹을 것 입을 것 제대로 못하시면서 그야말로 눈물겨운 질곡의 삶을 살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훗날 저와 형 그리고 둘째 여동생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형편이 나아지자 신작로 삼거리에서 오고가는 공무원들을 붙잡고 술을 사주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는 드물게 자식 셋이 공무원으로 일하니 자랑스러웠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변변한 양복 한번 제대로 못 사 입으셨습니다. 회갑잔치 직후, 제가 모셨던 지사님께서 양복티켓을 회갑선물로 주셔서 서울까지 올라가 양복을 맞춰 입게 됐지요. 아버지는 너무 좋고 귀한 옷이라며 명절에나 입으신 후 장롱에 모셔두곤 했는데 결국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동네에서 유명한 술꾼이셨던 아버지는 인정도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시는 보기 드문 시골 멋쟁이셨지요. 술 한 잔 걸치고 돼지고기 한 근을 사서 들고 올 때면 이미자의 '황포돛대'나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를 멋들어지게 부르곤 했습니다.



벌초는 단순히 풀을 깎고 잡초를 뽑는 일이 아니지요. 어르신들의 힘겨웠던 삶을 생각하며 마음을 곧추세우는 일입니다. 벌초를 마치고 돌아서는 마음은 산자락을 붙잡고 돌아설 줄 몰랐습니다. 가끔 그리도 절절히 뵙고 싶을 때가 있는데 아버지는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나 하늘나라로 가신 지금이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크나 큰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언제나 큰 가르침을 주시는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벌초를 마치고 헛헛한 마음으로 "내 마음 별과 같이"를 흥얼거리며 산을 내려 왔지요. 이번 추석에는 산소를 찾아 아버지의 애창곡을 정성을 다해 불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꾸 생각이 많아지고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걸 보면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 중인가 봅니다.

홍승표 / 시인

홍승표-기고
홍승표 / 시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취임 100일 인터뷰] 황창선 대전경찰청장 "대전도 경무관급 서장 필요…신종범죄 강력 대응할 것"
  2. 경무관급 경찰서 없는 대전…치안 수요 증가 유성에 지정 필요
  3.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중부권 최대 규모 크리스마스 연출
  4. 이장우 "임계점 오면 충청기반 정당 창당"
  5. 세종시 50대 공직자 잇따라 실신...연말 과로 추정
  1. [사설] 아산만 순환철도, ‘베이밸리 메가시티’ 청신호 켜졌다
  2. [사설] 충남대 '글로컬대 도전 전략' 치밀해야
  3.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4. 연명치료 중에도 성장한 '우리 환이'… 영정그림엔 미소
  5.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헤드라인 뉴스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행정통합, 넘어야 할 과제 산적…주민 동의와 정부 지원 이끌어내야
행정통합, 넘어야 할 과제 산적…주민 동의와 정부 지원 이끌어내야

대전과 충남이 21일 행정통합을 위한 첫발은 내딛었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많다는 지적이다. 대전과 충남보다 앞서 행정통합을 위해 움직임을 보인 대구와 경북이 경우 일부 지역에서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지역 갈등으로 번지고 있는 모양새다. 대전과 충남이 행정통합을 위한 충분한 숙의 기간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을 발표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1989년 대전직할시 승격 이후 35년 동안 분리됐지만, 이번 행정통..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