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상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명예교수 |
교육은 백년대계(百年大計)임에도 과거 우리나라는 입시제도가 갑자기 바뀌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3년 여름 중학교 입시 과목이 전(全) 과목에서 국어와 산수 과목으로 바뀌었다. 어린 수험생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의도였겠지만, 산수(수학) 과목이 약한 나에게는 불행이었다. 결국, 1차(전기) 대전중학교에 떨어지고 그해 2차(후기)로 바뀐 한밭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린 마음이지만,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거의 매일 도서관에서 늦게까지 공부했다. 또 월말고사 때는 누나들과 함께 밥상을 펴놓고 시험준비에 몰두했다.
한편, 나는 누나들의 역사 교과서 읽기에 푹 빠졌다. 국사뿐 아니라 두꺼운 세계사 책도 열심히 읽었다. '역사 속의 이야기'가 너무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1965년 서울로 직장을 옮긴 아버지가 일하시다가 사고를 당했다. 이후 아버지는 평생을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했는데, 다음 해 2월 초에 우리 집은 아버지 회사에서 제공한 도림천 변 문래동 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중3인 나와 고3인 셋째 누나는 각기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년 더 대전에 살기로 했다.
1966년 3월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고등학교 시험 대비로 대전역 근처 영풍학원에 등록했다. 서울에서 받는 생활비가 빠듯했는데도 누나는 나에게 학원비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누나가 왜 항상 자기의 밥을 적게 담고 내 점심 도시락만을 싸는지를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는 지금도 누나와 둘이 자취하면서 살았던 1966년을 잊지 못한다.
필자의 한밭중 졸업사진(1967.1) |
당시 영어나 수학 수업 모두 매번 선생님이 준비한 프린트로 공부했는데, 나는 수학 수업이 끝난 후, 교단으로 갔다. 임경태 선생님에게 요즈음 어떤 참고서에서 문제를 뽑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왜?"하고 되물었다. 사실대로 말했다. 학원비가 없어 4월 등록을 할 수가 없어 선생님이 참고하는 참고서를 도서관에서 빌려 공부하려 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영상이는 늘 앞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 그냥 나와라. 너는 앞으로 계속 장학생이다."
뜻밖이었다. 너무 감사했다. 열심히 공부해 4월 월말고사에 수학도 100점을 맞았다. 여름방학이 되었다. 누나와 나는 방학 한 달 동안 서울로 가기로 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방학 동안에 방을 사용하지 않으면 월세를 받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누나는 이미 비(非) 진학반으로 돌린 상태라 별문제가 없었으나, 나는 계속 학원에 나가고 싶었다. 역시 수학이 문제였다. 다시 수업이 끝난 후, 임경태 선생님께 방학에 서울에 가야 해서 학원을 나올 수 없는데 어떤 참고서를 보면 좋으냐고 물었다.
청주가 본가인 임경태 선생님은 나를 수풀림(林) 종씨라고 더 아껴주셨는데,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집안 사정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선생님이 "우리 집에 가자."라고 하셨다. 당시 선생님은 아직 미혼이셨다. 선생님 집은 상가 건물이었다. 함께 지내자고 하셨다. 나는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을 애써 참았다. 방학이 끝나기 전에 선생님은 나에게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동급생인 한밭중 3학년 송영석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겨울방학 전까지 지낼 수 있었다.
내가 거처할 곳이 마련되자 누나는 월세방을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고 돈을 내지 않고 자신과 함께 지내자는 주인아주머니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우리는 서울에서 보내는 생활비를 더 줄일 수 있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누나는 서울로 갔고 나는 학교 근처에서 처음으로 하숙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룸메이트는 옥천에서 통학하다가 입시를 앞두고 하숙하게 된, 같은 3학년 6반인 엄기현이었다. 1967년 1월 한밭중학교 졸업식에 내 가족은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밭중학교 졸업사진은 기현이와 찍은 사진이 유일하다. 가슴의 꽃도 기현이 어머니가 꽂아 주신 것이다.
용산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임경태 선생님이 고등학교 수학 교사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생이 되어 찾아뵈어야지 했는데. 결국, 아직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큰형처럼 돌봐준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참으로 은혜를 갚지 못한 나쁜 제자이다.
나도 이제 칠순이다. 임경태 선생님을 뵙고 큰절을 올리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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