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전(한남대 명예교수) |
지난 18일은 가장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받는 김대중 대통령이 세상을 뜬 지 12년이 되는 날이었다. 역사를 길게 보면 광복 후 100년의 역사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 대통령 두 사람은 박정희와 김대중이 아닐까 싶다. 독재자로서 수많은 무죄한 사람들을 탄압하면서, 문제가 많았던 산업화를 밀어붙여 가난한 백성이 적어도 굶주리지 않게 했던 공을 세우고 산업화를 이룩한 박정희. 그와 평생 대척점에 서 있었던 김대중.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뜨겁게 박정희와 맞붙은 그는 우여곡절 끝에 27년 만에 대통령에 올랐다. 한국의 민주화는 그의 삶을 통해 모양과 색깔을 지니며 점진적으로 구현되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추구하는 과정에 남겨 놓은 많은 정치·사회·경제적 모순들의 폭발이었던 IMF 사태를 해결하며 그 방안으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하는 국가'를 만들겠다는 구상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IT 혁명 시대를 열었던 김대중. 온 세계는 그의 삶의 투쟁에 고개를 숙였고, 전 세계인에게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한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문화 감수성이 매우 강한 대통령이었다. 전라도 외딴섬 하의도 출신인 그의 부친은 음악 재능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특히 판소리 실력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춤도 능했고, 그의 '쑥대머리'는 일품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부친 덕분에 대통령 자신도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을 수 있고, 꽹과리, 장구, 북을 흉내 내는 정도라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1990년대 초 높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기성세대가 싫어했던 한류의 원조 서태지의 음악성을 예리하게 감지한 정치인이었다. 서태지의 '하여가'의 밑바탕에 서린 판소리의 미세한 구절을 감지하며 그 가능성을 일찍이 간파한 그는 대중음악의 정치적 사회적 함의와 영향력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했다.
신세대 문화에 대한 감수성으로 K-Pop의 물꼬를 텄던 그는 한국민의 문화 DNA가 일본문화를 너끈히 압도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대중문화 유입을 허용했다. 그 결과는 우려와는 정반대로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켰다. 아마 하늘에서 BTS의 성공을 보며 그럼 그렇지! 하고 무릎을 칠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분야에서의 그의 공헌도 지나칠 수 없다. 할리우드 영화에 짓눌렸던 한국 영화계는 그가 통상압력 속에서도 스크린쿼터제를 고수하고,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 보장과 영화계에 대한 물질적 지원 정책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 상징물이 영화 '쉬리'였다. 남북분단체제의 타부를 깨뜨리며 한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650만 관객을 불러들인 이 영화 이후 1000만 관객 영화가 나래비를 섰다. '기생충'은 이런 발전의 결정이었다.
21세기에는 한국의 문화가 세계를 휘어잡으리라는 그의 예언이 그의 사후에 실현되고 있는 양상을 보노라면 그의 문화적 선견지명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많은 정치인이 대통령의 대업을 맡겠다고 나서고 있다. 서로의 약점을 캐물으며 자신을 내세우기에 바쁘다.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듯이, 문화 감수성이 뛰어난 잘 준비된 이가 대통령이 되어 품격 있는 문화강국 대한민국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이가 해당할까. 더 좀 지켜봐야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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