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홍수다. 어쩔 수 없이 선별이 필요하다. 현대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태초이래 수많은 생명체가 오갔지만 모두 선망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섭렵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기록되지도 않는다. 어느 것이 대상이 될까? 누구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뭔가 범상치 않은 것이다.
기억되기 위해 사는 것일까? 기억하기 위해 사는 것일까? 기억하는 것이야 자유지만, 기억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가 없다. 그러함에도 기억되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습을 본다. 기억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범상치 않은 일을 하면 된다.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오래전 정보관리학을 공부할 때 접했던 기억이다. 여섯 단계만 거치면 세상 누구와도 안면을 틀 수 있다. 서양 속담으로 알려져 있다.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 ~ 1984, 미국 사회심리학자) 등 학자들의 연구도 뒷받침된다. 여섯 단계의 분리(six degrees of separation)개념, 작은 세계, 작은 세계 네트워크(small-world network) 등이다. 국내외 실증적 조사 사례도 있다. 사이버 사용자 접촉 고리가 조사된 바도 있다.
한 사람이 맺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 인원이 150명이라 주장한 던바의 수(Dunbar's number)를 소개한 적이 있다. 개인 성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개략 100명으로 계산해도 100의 5승이면 100억이 된다. 세계 인구수를 훨씬 상회한다. 둘을 합쳐 생각하면 유명세 유무를 떠나 그 어디에 살아도 서로 알 수 있는 관계라는 말이 된다.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서로 안다는 의미다. 그런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련성(relationship)을 떠올려 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병의 팬데믹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불과 여섯 단계만 거치면 세계인 누구나 서로 만나게 된다. 따라서 전염을 차단하는 방법은 접촉하지 않거나 줄이는 것뿐이다. 아니면, 사전에 발생 자체가 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밖에 없다.
사이버 세계에서 보면 수긍이 간다. 놀랍기도 하지만 섬뜩하기도 하다. 지금은 기존 언론이 사이버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도하는 형태지만, 앞으론 사이버 자체가 언로이며 언론이 될 것이다.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개인은 물론 국가와 국제관계에서도 상호배려와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폭력과 테러 대상이 되면 감당하기 어렵게 된다. 어느새 사이버 세상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사례를 쉽게 목격하게 된다. 기껏 사이버세상을 만들어 놓고 흙탕물로 만들다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프라이버시, 개인 정보 보호 운운하지만, 공개하는 것이 사이버 세상이다. 정보 공개가 아니라도 개인에 대한 모독이나 인신공격이 있었다. 공개를 막을 것이 아니라 공개하는 개인 정보 활용 방지 방안을 강구 해야 한다. 어떠한 삶도 비난과 공격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자신의 행태에 대한 무한 책임감이 강조되는 세상이다. 명백한 진실이 요구된다. 행태에 따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거나 열광하기 때문이다. 극명하게 심판이 갈린다.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이야 얼마나 좋은 일인가? 긍정적인 힘의 산실이다. 그런 팬덤(fandom)이 악용되는 사례도 많이 보게 된다. 사랑하는 방식이 공격하는 수단으로 바뀐다. 서로 못 죽여 안달이다. 수년간은 유지될지 모르나 분명 사이버 심판을 받게 되리라. 지금은 전환기이라서일까? 거짓으로 일관하고, 책임지지 않고, 남을 무차별 공격한다.
융합의 시대, 통섭의 시대 논리를 배우며 예술의 장르 해체를 예견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과 과학적 사유, 근본 원칙성이 함께 아우르는 세상, 온갖 지식이 통합되는 통섭의 시대에 예술이라고 다를 수 없다는 생각이다. 뿐인가, 일상생활이라고 벗어날 수 있겠는가? 거기에 필요한 것이 배려요, 협력이고 협조다. 추앙받고 싶다면 쓸데없는 열정으로 괜한 흔적을 남기려 애쓰지 말라. 시대 흐름을 바로 읽고 범상치 않은 사람이 되도록 절차탁마하라.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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