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도우미란 단어가 좋은 쪽이 아닌 퇴폐적이고 나쁜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원래 도우미의 뜻은 도와주고 해결해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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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서 모인 도우미들이 발대식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
이런 도우미들이 처음 탄생한 곳이 바로 대전엑스포다. 당시 세계적인 행사를 치름에 있어 각종 행사진행과 안내, 번역 등을 맡아줄 사람들이 필요해지자 국민들에 대한 일반 공모를 통해 도우미를 모집했다. 선발기준은 키160cm 이상, 나이 만 18세 이상 ~ 만 30세 이하(당시 기준 1975년 이전 출생에 1963년 이후 출생자에 해당)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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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엑스포의 꽃이란 말이 이래서 나온 듯하다. |
경쟁률도 높아 탈락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배우 채시라 씨가 명예 도우미로 활약했다. 최종 선발된 인원들은 합숙을 하며 걷는 연습, 표정, 말하는 매너 등 도우미의 기본에 대해 맹훈련을 받았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고 매 순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니 훈련도 만만치 않았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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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은바 임무에 따라 도우미들의 유니폼 색상이 달랐다. |
도우미는 대전엑스포의 꽃이었으며 꽃(?)들은 학생들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도우미와 말 한번 걸어보겠다고 이미 알고 있는 위치를 물어보거나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도 난다. 약 30여 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당시 도우미들도 지금은 모두 중년이 되어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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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에도 불구하고 환한 미소를 잃지 않고 행사에 임하고 있는 도우미들. |
친절하고 아름다운 미소로 무장한 도우미들은 안내소, 분실물보관소, 미아보호소 등 대전엑스포 이곳저곳을 누비며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환한 미소로 관람객들을 맞이해주는 모습이나 미아보호소에서 아이를 진정시키며 부모를 찾아주던 모습 등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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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엑스포에 투입된 도우미의 인원은 6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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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옷을 입고 박람회장을 이동하는 도우미들. 역시나 환한 미소는 잊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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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있는 미아를 미아보호소로 데려가는 도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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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을 입은 도우미들이 한빛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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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객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도우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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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단식에 참석한 도우미들이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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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단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도우미들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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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식에서 참가국 소개판을 들고 있는 도우미들. |
이렇듯 아름다운 도우미들의 활약으로 대전엑스포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성희 기자 token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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