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대전역 소식 시민들 관심 높아… 문 앞 기찻길 보행 충돌사고 잦아
年 철도보행 260명 사망 희생 잇달아… 68년 판암역 유조차 전복사고 등
대전시를 관통해 도심을 양분하는 경부선 기찻길.대전은 철로의 불편을 극복하며 도시로 성장해왔다. (사진=대전시청) |
▲시민 애환담은 철도
대전시민에게 철도는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60년 9월 중도일보는 탑승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서민들이 이용한 여객 3등 열차를 조명한 기사를 게재했다. "언제나 그러하듯 3등 열차 내는 사람과 이에따른 짐짝으로 마치 콩나물 그릇과도 같어 쥐새끼마저 음작할 공간도 없다"라며 "승강구 앞에는 얼씬도 못할 정도로 승객으로 들어차 창문으로 기어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묘사했다. 이에앞서 1959년 8월 보도에서는 대전역에서 으레 목격되던 검차수의 모습을 그렸다. "철로를 달리는 철마의 발에 병이 났다고 가상해보자, 너무도 끔찍하고 몸서리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라며 "저만치 기차가 들어오면 기차바퀴나 혹은 기차 둘레 달린 모든 기계류를 찾아다니며 두딱 두딱 망치를 들고 두드리는 것을 볼 수 있거니와 이것이 곧 검차라는 이름의 건강진단이다"라고 기사를 통해 소개했다. 통근열차 소식도 빠지지 않아 1968년 12월 지면에서는 전북 김천발 대전행 통근열차가 영동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켜 1시간 50분 연착됐는데 당황한 기관사가 충북 영동의 가풍역을 그냥 지나쳤다가 도로 후진해 50여 명의 승객을 싣고 운행했다며 열차운행 난맥을 지적했다. 1959년 8월 대전역 신축을 축하하기 위해 대전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역 플랫폼에서 시민들에게 인사했고, 1959년 재일교포학생 야구단의 충남방문 때 환영식을 대전역 플랫폼에서 이뤄졌다.
▲문 열면 철길 사고도 잦아
1960년 9월 대전의 기찻길에서 노는 어린 아이들 모습을 담은 사진기사는 대전시민들이 철도사고에 얼마나 취약한 생활을 해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진기사에 붙은 제목은 '선로 위에 철없는 생명'으로 "기적소리도 아랑곳 없이 철도상에서 뛰노는 어린이, 앗차하는 순간에 산테미같은 기관차에 짓밟혀 죽을 수도 있는 지극히 위험한 곳이다"며 위험을 강조했다.
1960년 9월 선로 보행사고 주의를 촉구하는 기사(사진 왼쪽)와 1967년 3월 대전 삼성동 건널목에서 버스 충돌사고. |
▲판암동 포도밭 기름범벅
열차 탈선과 충돌사고가 빈번히 발생했고, 안타까움을 샀다. 1968년 12월 10일 대전 동구 판암동에서는 화물과 기름을 실은 화물열차가 탈선해 벙커C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화물차와 유조차 33량을 연결해 서울로 가던 1014호 열차가 판암건널목에서 오후 6시 40분께 선로 밖으로 탈선했다. 이 사고로 유조차에 실려 있던 벙커C유가 쏟아져 인근 포도밭 500평이 완전히 기름바다를 이뤘고, 마침 인근을 지나던 주민이 기름에 뒤덮혀 중상을 입었다고 중도일보 지면에 소개됐다.
1968년 12월 대전 판암역 화물열차 탈선사고. |
▲기찻길과 대전역을 옮길 구상도
경부선이 대전을 남북으로 가르고 호남선은 동서로 도시를 양분하면서 이들 철도와 대전역을 도심 외곽으로 옮기는 도시계획 구상도 진행됐다. 도심을 관통하는바람에 도시균형발전에 걸림돌이고 도로와 하천 등 도시계획차원에서도 큰 불편으로 등장해 철도이전이 불가피하다는 검토였다.
1989년 8월 중도일보는 이같은 소식을 전하며 대전에서 철로가 차지하는 토지 면적은 경부선 222만㎡, 호남선 113만㎡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더 나아가 대전역을 지금의 회덕부근에 새로운 역사를 신설해 이전하고 호남선의 회덕분기점을 세천에서 분리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경부선은 경부고속도로 부근 그린벨트 지역으로 이설을 대전시가 신중히 검토하고 있음을 소개했다. 이같은 구상은 결과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으나, 서대전육교와 홍도육교 외에 지하차도나 육교가 충분히 개발되지 않아 철길을 장애물로 보는 시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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