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 五(다섯 오), 關(빗장 관), 斬(벨 참), 將(장수 장)
출전 :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비유 : 겹겹이 쌓인 난관을 돌파하는 것과 충(忠), 의리(義理)를 비유하는 말이다.
조조(曹操)가 십오만 대군을 몰아 서주(徐州)를 공격하자 겨우 몸을 의탁하고 있던 유비(劉備)는 도망하여 원소(袁紹)에게 의탁하였다. 한편 하비성을 지키던 관우(關羽)도 함께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성을 빼앗기고 유비의 두 아내인 감부인(甘夫人)과 미부인(?夫人)마저 적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관우는 싸우다 산으로 잠시 은신했고 항복을 권유하는 조조의 부하 장요(張遼)에게 3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투항하겠다고 말하였다.
첫째, 자신의 항복(降伏)은 조조(曹操)가 아닌 한(漢)나라 황제에게 항복하는 것이며,
둘째, 자신이 모시고 있는 유비의 두 부인에 대한 안전과 황실의 녹봉을 보장할 것,
셋째, 지금은 행방을 모르지만 유비가 있는 곳을 알면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것이었다.
조조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자 관우는 항복하였다. 관우는 후에 조조와 원소 간의 전투 중 백마(白馬) 전투에서 조조를 위하여 원소의 맹장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베는 공을 세웠고. 조조는 유비를 향한 관우의 충정과 의리의 마음을 자기에게 돌리기 위해 여포(呂布)가 타던 적토마(赤兎馬/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최고의 명마)를 주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관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얼마 후 관우는 유비가 원소에게 의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조를 떠나게 된다.
관우를 보내기 싫었던 조조는 관우의 작별인사를 받지 않으려 만나주지 않았고, 그런 입장을 눈치 챘던 관우는 조조에게 받은 보물을 포함하여 노예와 미인까지도 그대로 남겨두고 형수 두 분을 모시고 떠난다.
한편 조조 진영에서 유비 있는 곳까지 가려면 관문 여섯 곳을 통과하여야 하는데 관문을 지키는 조조의 장수들은 관우를 해치고자 통과를 허락하지 않고 싸움을 건다.
첫째 통관인 동령관(東嶺關)에 이른 관우는 통행령을 전달받지 못하였다며 가로막는 공수(孔秀)를 베고 낙양(洛陽)으로 향하였다.
두 번째 낙양관(洛陽關)에 이르러서는 낙양 태수 한복(韓福)과 그의 아장(牙將) 맹탄(孟坦)을 베고 돌파하였고, 세 번째 사수관(?水關)에서는 변희(卞喜)를, 네 번째 통관인 형양관(滎陽關)에서는 왕식(王植)을, 마지막 다섯 번째 관문에서눈 황하를 건너는 활주관(滑州關)에서는 진기(秦琪)를 베고 유비가 있는 원소의 영토로 들어선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조는 통관을 허락하고 직접 멀리까지 배웅을 나와 노자와 금포(錦袍)를 주니 관우는 의리상 노자는 사양하고 금포만 받고 유비에게로 간다.
관우는 이처럼 중국 역사상 수많은 무장 중에서 순수한 충성심, 의리, 뛰어난 용맹, 기묘한 무예, 당당한 성품 등이 두드러져 사람들에게 신으로 숭배되었으며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일컬어진다.
관우에게 왕이라는 작위가 붙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다.
이후 관우를 황제로 높여 부르기까지 하였고. 실제 동양권에서의 관우는 도교의 위세에 크게 힘입어 문(文)에는 공자(孔子), 무(武)에는 관우로 대우받게 된다.
이어서 중국 사람들은 관우의 묘를 '관림(關林)'이라고도 하는데, '림(林)' 자는 오직 성인의 무덤에만 붙였던 글자다. 중국 역사상 '림(林)' 자가 붙는 무덤은 단 두 개뿐으로, 바로 유학의 시조 공자의 무덤인 공림(孔林)과 관우의 무덤인 관림이다. 관림은 모두 세 곳으로 관우의 목이 안장된 낙양관림(洛陽關林), 그의 시신이 묻힌 당양관림(當陽關林), 그의 고향에 세워진 운성관림(運城關林)이다.
관제묘(關帝廟)가 사당 형식으로 처음 세워진 것은 명(明)나라 말기인 1594년으로, 명나라가 자신들의 임진왜란 출정 때 이긴 것을 관우장군의 덕이라고 여겨서 세워져 중국대륙 각지, 나아가 대만, 홍콩, 한국, 일본 등지에도 관제묘가 세워졌다. 우리나라에는 관왕묘나 혹은 관제묘라고 하며 주로 충청도, 경상도 지방에 더러 있다. 서울시 종로구에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東廟)'가 바로 이 관왕묘 중 하나이다. 이 관왕묘에는 관우를 죽인 여몽의 성(姓)과 같은 여(呂)씨와 육손의 성과 같은 육(陸)씨가 들어오면 아무 이유도 없이 해를 당한다는 터무니 없는 전설이 있다.
우리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읽으면서 유비의 관용(寬容)함에 감명되고, 재갈량의 지혜(知慧)에 놀라고, 관우의 의리(義理)에 감동하고, 조조의 간특(姦慝)함에 분노하기도 한다.
세인(世人)들은 늘 세상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없어지고, 충(忠), 효(孝)사상이 사라져감을 아쉬워한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단하며, 이제는 경쟁을 넘어 남을 깎아내려야 자기가 체면이 서는 이상한 풍토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학교에서 문(文)만 배우고, 인성(人性)을 소홀히 하고, 정치(政治)는 국민을 구제(救濟)함을 버리고 싸움과 분탕(焚蕩)질로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려움과 암흑 같은 세상에 젊은이들의 올림픽 성과는 너무 신선하고 자랑스럽다, 구린내가 진동하는 세상에 한 줄기 밝은 빛을 보는 것 같아 다시 대한민국의 희망을 기대해본다. 이제 제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以掌蔽天] 얄팍한 속임수는 없어야 될 것이다. 국민들은 점점 지쳐가고 있다.
이런 때 관우(關羽)가 그리운 것은 그의 변함없는 의리와 거짓 없는 정의가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은 아닐까?
장상현 / 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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