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비 오시는 날, 창가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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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비 오시는 날, 창가에 앉아

홍승표 / 시인

  • 승인 2021-08-06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비 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는 말이 있다. 일을 할 수 없으니 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른 아침, '소고기 등심 굽는 소리'에 잠깨어나 창밖을 보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눈비비고 일어나 우두커니 앉았는데 너른 고을(廣州)에서 지내던 시절의 기억들이 무지개처럼 떠올랐다. 며칠이고 비가 오시는 날이면 동네 형들과 함께 고기 잡는 그물을 둘러매고 개울로 나갔다. 비가 많이 오고 물살이 발라지면 고기들이 얕은 물 가장자리로 나와 잡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물이 잔잔한 날엔 어항을 놓거나 그물로 고기를 잡는데 피라미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물이 불어난 날엔 미꾸라지, 붕어, 새우 등 다양한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손질한 고기와 새우를 넣고 고추장을 풀어 넣어 끓인 매운 탕 맛은 시원하고 달달했다. 밥을 말아먹어도 좋고 국수를 넣거나 수제비를 넣어 끓여내도 맛있는 한 끼가 되었다. 장마철엔 이렇게 고기를 잡아 집집마다 돌아가며 매운탕을 끓여먹었다. 그 때마다 잡힌 고기가 다르고 들어가는 양념이 다르니 매운탕 맛도 서로 다른 개성이 있었다. 그래도 고기가 신선하고 공들여 정성으로 끓이니 어느 집에서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던 나는 동네 형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세상일들과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지냈다. 학교에서는 듣지도 배울 수도 없는 인생 공부를 미리 한 셈이니 나름 행복한 보약 같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장남이 잘돼야한다고 생각한 부모님은 형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세 살 터울인 형이 대학시험에 떨어지고 재수를 시작할 무렵에 나는 고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걱정이 많은 부모님은 제가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일을 도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그래도 조금 늦게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학교 교복에 배지(badge)만 바꿔달고 공부하면서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나 희뿌연 안개 속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는 게 속상했다. 억수같이 비가 오시는 날 무작정 빗속을 정처 없이 헤매다 돌아왔을 때, 돌아온 것은 어머니의 호통뿐이었다. 그리곤 속상했는지 부엌에서 우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숨죽여 울었던 기억이 난다.

"승표 형! 날궂이 합시다." 도청에서 일할 때, 비 오시는 날엔 전화하는 친구가 있었다. 시청 옆, 실내포장마차 '이모네 조개구이'엘 달려 나가면 친구는 술잔을 건네며 넉살좋은 웃음을 날리곤 했다. 닭똥집과 곰 장어구이가 나오기도 전에 계란말이로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이 사라지곤 했다. 포장마차는 맛깔스런 안주를 맛볼 수 있는 보물창고다. 거나하게 술이 오르면 뜨끈한 홍합탕으로 속을 달래며 다시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에 장단 맞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속칭 2차 역시 또 다른 포장마차를 찾아들어 술잔에 담기는 세상사(世上事)를 풀어내는 개똥철학자가 되기도 했다.



비가 오시는 날엔, 창가에 앉아 멍 때리는 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를 더할 수 있는 보약 같은 날이다. 살다보면 '지금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부호가 떠오를 때가 있다. 비 오시는 날이 '살아가는 삶의 철학과 가치관'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귀한 날이다. 불볕더위 속에서 요란하게 날아드는 새소리, 쓰르라미 소리는 더위에 지친 눈까풀을 내려앉게 한다. 그러나 호박 전(煎)부치는 빗소리는 찌든 삶의 더께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함이 있다. 비 오시는 날, 창가에 앉아 넋 놓고 빗소리를 들어보자. 찌든 삶의 더께가 씻겨 내리고 상상조차 못했던 생각이 꿈의 나래를 펴고 올라 무지개로 떠오를 것이다.

홍승표 / 시인

홍승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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