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특히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이와 같은 초고순도 물질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반도체의 경우 나노 미터 수준의 극미세 가공을 해야 하므로 불순물 하나하나가 제품의 품질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에는 통상의 방법으로 제어할 수 없는 '불순물'도 존재한다. 주기율표에는 원자를 이루는 양성자의 개수, 즉 원자번호에 따라 각종 원소가 정연하게 배치돼 있다. 그런데 원자의 질량을 나타내는 원자량은 상당히 들쭉날쭉 변한다. 그것은 양성자의 개수는 같지만 중성자의 개수가 서로 다른 동위원소가 존재하며 동위원소의 비율도 원소에 따라서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같은 원소라면 서로 다른 동위원소 간에 화학적 성질은 별반 차이가 없다. 따라서 동위원소를 직접 사용하는 원자력과 방사선 관련 산업을 제외한 전통적인 산업에서는 소재를 고를 때 동위원소까지 고려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 원자력 발전의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우라늄-235를 농축하고 남은 열화우라늄이 군사용으로 사용되면서 그나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양자 컴퓨터가 실용 수준까지 발전하면서 실리콘-28이 주목을 받고 있다. 양자 컴퓨터에 정보를 저장하는 기본 단위인 큐빗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원자번호가 14번인 실리콘 원자 사이에 원자번호 15번인 인(燐) 원자를 하나 끼워 넣어 인 원자의 핵스핀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때 실리콘의 다른 동위원소인 실리콘-29가 있으면 잡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실리콘-28만으로 이루어진 기판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다른 동위원소도 마찬가지지만 고순도로 농축된 실리콘-28은 쉽게 구하기 어렵다. 마침 세계의 표준기관들에서 질량의 표준을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에 원심분무 기술을 사용해 99.99%까지 실리콘-28을 농축한 바 있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에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이에 미국 표준기술연구소는 질량분석 기술을 사용해 순도 99.9999% 이상의 실리콘-28 농축에 성공했으며, 이는 양자컴퓨터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됐다.
그러고 보면 소재에 동위원소를 사용하는 시도가 점차 늘고 있다. 수소의 동위원소인 중수소를 쓰면 화합물의 화학적 안정성이 좋아지는 경향이 있어서, 몇몇 기업에서 디스플레이와 같은 첨단 제품의 제조 공정에 중수소를 사용한다고 한다. 또한 일부 동위원소는 에너지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어서 조만간 탄소-14나 니켈-63을 사용해 만든 스스로 충전하는 배터리가 시장을 두드릴 것으로 기대된다.
원소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고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과학자의 꿈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인류가 찾을 수 있는 궁극의 소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주기율표의 들쭉날쭉한 원자량 속에 감춰진 동위원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융복합양자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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