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청한어(淸寒語)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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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청한어(淸寒語)를 품다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 승인 2021-08-02 09:17
  • 김소희 기자김소희 기자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생육신으로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을 묶어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연애소설 '금오신화'를 썼지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깨친 그의 재주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1390~1440)이 '시습(時習)'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으로 재주만 믿지 말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세종대왕도 감탄한 신동 김시습이었지만 불행한 가정사와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방랑과 기행을 일삼으며 설잠(雪岑)이라는 승려가 되어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었으나 머리는 깎고 수염은 기르고 다녔지요. 스스로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기상을 나타낸 것이라며 시속의 통념에 따르지 않고 몸가짐을 흩트리며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방외인(方外人)을 자처했습니다.

청한자(淸寒子)는 김시습의 또 다른 호로 그의 잡저 10편 중 무사제일(無思第一)에서 '청한자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도를 이루기에 항상 촌음이 아까워서 일찍이 한시도 방일하지 않았는데…' 시작되어 산림제이(山林第二) 삼청제삼(三請第三)에서 나오는 어록을 1937년 정축원단에 퇴경 권상로(1879~1965)가 '청한어'란 필사본으로 남겼습니다. 퇴경은 동국대 초대총장을 역임한 불교계의 석학으로 책을 읽지 않았어도 문장이 되고 서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글씨가 되고 그림을 배우지 않았어도 그림이 된다며 흠모하였지요. 그 무렵 퇴경은 불교사 사장을 사임하고 불교전문학교 교수로 '이조실록불교초존'을 비롯한 저술에 매진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비단 금박의 고박(古朴)스러운 필사본인 청한어는 해서와 초서로 쓰인 32페이지 분량인데 장산 김두한 서예가는 '퇴경의 해서를 보면 초당(初唐)의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을 비롯한 유공권의 제첩을 두루 섭렵한 풍모가 여실히 드러나며 특히 속됨이 없는 필획에서 꼬쟁이 같은 골기만이 보여 퇴경의 올곧은 성품이 글씨에 그대로 녹아들었으며, 초서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일필휘지한 호쾌한 멋이 격조 있는 매우 안정된 장법으로 탈속(脫俗)한 문인의 풍모를 엿볼 수 있는 글씨라 여겨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조부 퇴경의 귀한 친필이 저에게 온 것은 80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시절 인연이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달 자유학기제 혁신학교 맞춤형 지원을 위한 초등교장 연수가 문경문학관에서 개최되었는데, 퇴경기념관을 둘러보던 이재명 교장께서 퇴경 친필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백조부의 유품을 한 점도 소장하지 못하고 있던 차 반가운 마음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교장선생은 지난해 문경시민대상(교육부문)을 수상한 참교육을 실천하는 분으로 대승사 주지를 역임하신 조부 설월(雪月) 스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청한어' 외에 퇴경께서 서문을 쓰신 불교의식총서인 안진호 강백의 『석문의범(釋門儀範)』(1939)을 선뜻 문경문학관에 기증하여 주셨습니다. 혼자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대의가 아니겠냐는 말씀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올여름은 코로나 때문에 여름휴가를 포기하고 말았지만 서둘러 사불산 대승사를 다녀와야겠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사불산 산마루에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이 있는데 서기 587년 붉은 비단으로 싸인 이 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진평왕이 직접 와서 예배하고 창건한 절이 대승사로 청담, 성철, 월산 등 고승대덕을 배출하였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퇴경과 설월 선대들께서 머무시던 인연이 우리 생에서 다시 만나 연꽃처럼 향기롭게 마음을 밝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입추가 말복보다 저만치 먼저 와 있습니다. 절기상 말복이 오고 입추가 오는 것이 순리겠지만 계절도 만약을 위해 가을을 앞당겨 준비하는 8월입니다.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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