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난순의 식탐] 네 끼 만에 먹은 밥

  • 오피니언
  • 우난순의 식탐

[우난순의 식탐] 네 끼 만에 먹은 밥

  • 승인 2021-07-28 13:09
  • 신문게재 2021-07-29 18면
  • 우난순 기자우난순 기자
KakaoTalk_20210728_094829884
우난순 기자
일 자로 된 허름한 건물이었다. 처마 아래 낡은 의자에 노파가 몸을 잔뜩 구기고 앉아 졸고 있었다. 한 낮의 땡볕이 너른 마당에 내리 꽂혔다.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제는 고전이 된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연상됐다. 당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황야의 무법자' OST가 울려 퍼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이쯤에서 징 박은 부츠를 신고 담배를 꼬나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짠! 하고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문을 드르륵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이 너덧 개쯤 될까. 의자 하나를 빼서 털썩 앉았다. 건너편 식탁에선 막 밥을 먹고 난 한 무리의 장정들이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포만감에 나른한 표정으로 잡담을 나눴다. 건설 노동자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이 먹은 음식을 쓰윽 훔쳐봤다. 젊은 주인 남자에게 나도 저들이 먹은 걸로 달라고 했다. "종주하셨나 봐요?" 얼굴에 미소를 담뿍 담은 주인이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순간, 맥이 탁 풀리며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 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오래 전부터 꿈꿨던 덕유산 종주. 무주구천동에서 경남 함양 영각탐방지원센터까지 1박 2일 코스였다. 설렘을 안고 시작했지만 덕유산은 입산자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줬다. 삿갓재대피소를 향한 산길은 끝이 없었다. 봉우리를 넘고 넘는 동안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안보였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불덩어리를 머리 꼭대기에 쏟아부었다. '이래도 안 나가떨어질래?' 폭염과의 사투였다. 빌어먹을 배낭도 한몫 했다. 반값 할인 한다길래 장만했는데 쌀자루처럼 축 늘어져 어깨가 빠질 것처럼 아팠다. 발가락이 부르터 발짝을 떼는 것도 고통이었다. 마오쩌둥과 홍군의 '대장정'이 이랬을까. 대장정은 368일에 이르는 인류 역사에서 믿기 힘든 극한의 행군이었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을 밤낮없이 걸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의 계속되는 추격과 폭격, 그리고 허기와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혁명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에드거 스노는 대장정을 "근대의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오디세이"라고 헌사를 붙였다.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대장정 아닌가.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삶의 여정 말이다. 부드러운 흙길이 있는가 하면 끝없이 이어지는 자갈밭 길을 걸으며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기를 수천 번. 그래서 '꽃길만 걷자'는 자기 위안적인 구호같은 수사가 넘쳐나는지 모르겠다.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의 눈부신 빛으로 비추어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 탐욕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이 얼마나 미천해 보이는지 모른다. 나라고 다를까. 미욱한 내가 부끄러워서, 욕망의 도가니에서 그악스럽게 아귀다툼을 벌이는 세상이 신물 나 산을 찾는다.

덕유산 종주는 고난의 행군이었다. 상처투성이의 영광이랄까. 햇볕에 그을린 얼굴은 시커멓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지만 해냈다는 긍지가 하늘을 찔렀다. 그것을 알아준 식당 주인장 앞에서 그만 가슴이 뭉클했던 것이다. 밥이 나왔다. 하얀 쌀밥이 눈부셨다. 이게 얼마만인가. 겉절이, 김, 콩자반, 꽈리고추찜, 오이무침, 생선조림 등 반찬이 다 맛있었다. 김치찌개는 최고였다. 푸욱 곤 사골처럼 진한 국물에 건더기가 흐물거려 씹을 새도 없이 넘어갔다. 정신없이 퍼먹고 밥 한 공기를 또 달래서 먹었다. 땀에 전 몸에서 쉰내가 풀풀 났다(숙소인 삿갓재대피소에선 비누 없이 세수와 발만 씻어야 한다). 꼬질꼬질한 행색이 걸인과 다를 바 없었다. 주인은 반찬도 갖다 주면서 많이 먹으라고 했다. 꿀맛 같은 밥이었다. 남덕유산 아래 함양 서상버스터미널은 요상했다. 버스표도 팔고 밥도 팔았다. 이런 게 시골의 풍경이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그리움과 함께 침이 고인다. <지방부장>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기고]대한민국 지방 혁신 '대전충남특별시'
  2. 금강환경청, 자연 복원 현장서 생태체험 참여자 모집
  3. "방심하면 다쳐" 봄철부터 산악사고 증가… 대전서 5년간 구조건수만 829건
  4. [썰] 군기 잡는 박정현 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5. 기후정책 질의에 1명만 답…대전 4·2 보궐선거 후보 2명은 '무심'
  1. 보은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에 국가배상 판결 나와
  2. 안전성평가연구소 '국가독성과학연구소'로 새출발… 기관 정체성·비전 재정립
  3. 지명실 여사, 충남대에 3억원 장학금 기부 약속
  4. 재밌고 친근하게 대전교육 소식 알린다… 홍보지원단 '홍당무' 발대
  5. '선배 교사의 노하우 전수' 대전초등수석교사회 인턴교사 역량강화 연수

헤드라인 뉴스


충청 4·2 재·보궐 결전의 날… 아산·당진·대전유성 결과는?

충청 4·2 재·보궐 결전의 날… 아산·당진·대전유성 결과는?

12·3 비상계엄 이후 탄핵정국에서 펼쳐지는 첫 선거인 4·2 재·보궐 선거 날이 밝았다. 충청에선 충남 아산시장과 충남(당진2)·대전(유성2) 광역의원을 뽑아 '미니 지선'으로 불리는 가운데 탄핵정국 속 지역민들의 바닥민심이 어떻게 표출될지 관심을 모은다. 이번 재·보궐에는 충남 아산시장을 포함해 기초단체장 5명, 충남·대전 등 광역의원 8명, 기초의원 9명, 교육감(부산) 1명 등 23명을 선출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을 놓고 여야 간 진영 대결이 극심해지면서 이번 재·보궐 선거전은 탄핵 이슈가 주를 이뤘다. 재·보궐을 앞..

‘전원일치 의견’이면 이유 요지 먼저 설명한 후 마지막에 ‘주문’
‘전원일치 의견’이면 이유 요지 먼저 설명한 후 마지막에 ‘주문’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과 관련,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이 ‘전원일치’이면 이유의 요지를 먼저 설명한 후 마지막에 ‘주문’을 낭독한다. 헌법재판소의 실무지침서인 ‘헌법재판 실무제요’ 명시된 선고 절차다. 재판관들의 의견이 엇갈리면 주문 먼저 읽은 후에 다수와 소수 의견을 설명하는 게 관례지만, 선고 순서는 전적으로 재판부의 재량에 달려있어 바뀔 수 있다. 선고 기일을 4일로 지정하면서 평결 내용의 보안을 위해 선고 전날인 3일 오후 또는 선고 당일 최종 평결, 즉 주문을 확정할 가능성이 크다. 평결은 주심인 정형식 재판관이 의견을..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 공식 첫 걸음…대전지역 금융 기반 기대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 공식 첫 걸음…대전지역 금융 기반 기대

제4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한국소호은행 컨소시엄(이하 소호은행)이 1일 기자회견을 열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전국 최초의 소상공인 전문은행 역할을 지향하는 소호은행은 향후 대전에 본사를 둔 채 충청권 지방은행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며 지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 소호은행은 이날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소상공인 맞춤형 금융서비스 계획을 발표했다. 컨소시엄을 이끄는 김동호 한국신용데이터(KCD) 대표는 "대한민국 사업장의 절반 이상이 소상공인, 대한민국 경제 활동 인구의 4분의 1이..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대전시의원 후보자 3인 ‘저를 뽑아주세요’

  •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사랑의 재활용 나눔장터 ‘북적북적’

  • 재·보궐선거 개표소 설치 재·보궐선거 개표소 설치

  • 3색의 봄 3색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