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학 교수 |
이처럼 몰락한 보수에 희미하나마 한줄기 새로운 빛이 비치고 있다. 청년세대로 대변되는 보수정당의 새로운 대표 취임과 나름 경쟁력을 갖춘 대권 주자들의 출현이 바로 그 빛이다. 새 대표의 취임과 그가 내놓는 일 처리의 새로운 방식들은 기성 세대와 정치권에 한편으로는 신선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으며, 그 결과는 속칭 '수구골통 정당'으로 조롱받던 보수정당의 이미지 개선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또 각종 여론조사에서 경쟁력을 갖춘 유력 후보들이 던지는 화두는 보수층의 갈급함을 채워주는 단비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보수의 회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너무도 과한 평가이리라. 지금까지는 그저 이미지 변신에 불과하다. 마치 청와대 행사 담당 비서관이 보인 몇 번의 단순 이벤트성 행사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모습을 아무리 반복한다 할지라도, 일시적으로 환호하고 싶은 대변자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를 가지고 보수가 회생하고 있다고 봐줄 수는 없다. 아니 형식에 치중하고, 몇몇 인사의 존재에 의존할 경우 오히려 더욱 식상해지고, 그 식상함이 실망으로, 그 실망이 외면과 분노로 이어져서 정말 구제불능이 될 수도 있다.
이를 벗어나 보수가 진정 '회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형식의 변화가 아닌, 몇몇 인물의 출현이 아닌, 실질이 문제이다. 내용이 바뀌어야 진정한 회생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롭게 채워져야 할 새로운 보수의 실질은 무엇일까? 바로 '따뜻한 보수'이다.
보수의 최고 가치가 무엇인가? 개개 인간의 존엄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판단과 행위에 자유를 부여하며, 존엄한 존재인 인간이 자유롭게 결정한 행위의 결과물들을 통한 상호경쟁을 당연시하고,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보수의 세계관이리라.
그러나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에 따른 실패자, 낙오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도 생각의 초점이 모여야 한다.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가슴으로 품어주고 회생시켜 줄 때 진정 보수의 가치는 빛나는 생명력을 영유할 수 있는 법이다. 이들을 품지 않고는 우리 인간 사회는 결코 유지도, 발전도 있을 수 없기에, 이들 모두가 다 같이 극히 존엄한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향한 보수의 지난 모습은 어땠는가? 자유와 경쟁의 미명 하에 이들을 도외시한 것이 사실 아닌가? 승자의 교만만이 있었을 뿐, 이들의 부진과 낙오가, 혹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었는지, 이들에게 다시 희망을 부여하고, 이들이 떳떳하게 존엄한 존재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한 흔적이 희미한 것이 사실 아닌가?
더 나아가 조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찬바람 휘몰아 대는 만주벌판에서 일생을 헌신한 자, 대한민국의 기초를 자유민주주의로 세우기 위하여 온 몸을 던진 건국의 주역, 풍전등화의 길목에서 맨몸으로 공산화를 막아낸 영웅,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산업화의 기틀을 놓아준 산업 역군, 민주가 유린당할 때 일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투쟁에 나섰던 민주투사, 이들에게 과연 보수는 진정성 있는 감사와 존경을 품었고 극진한 예우를 보냈던가?
이제라도 차가운 보수에서 따뜻한 보수로 거듭나야만 한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보수의 회생은 시작된다. 능력이 출중한 자와 좀 부족한 자,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같이 서야 한다. 분리에서 연대로, 홀로에서 함께함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따뜻한 보수이고, 이것이 보수의 회생 모습이다. 진정 보수는 몰락을 딛고 회생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경쟁에서의 승리자, 자유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라 칭하는 자들의 태도에 달려있다. /손종학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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