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움직이면 학생과 주민이 가도에 동원되어 환영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학생 동원이 사라지고, 장시간 무전기 든 검은 양복 입은 사람이 즐비하게 서성이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있다가 통과하는 시점에 잠깐 교통 통제하기도 했다. 이제 가능하면 주민 불편을 덜기 위하여 노력한다. 나들이하는 것조차 권위의 징표로 삼으려 했던 것이 점차 사라진다. 오롯이 변화에 부딪히며 살아왔다.
과거에는 어땠을까? 그림은 정조의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이다. 정조(正祖, 1752 ~ 1800, 조선 22대 왕)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 아들이다. 경복궁 안에 있다가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진 사도세자 묘를 1789년 현재의 수원 남쪽 화산 자락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효심이 깊은 정조는 매년 사도세자 생신 무렵인 일 이월 이곳을 방문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다. 1795년 부모 회갑을 맞이하여 수원 화성으로 행차,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벌였다. 이를 8폭 병풍에 담았다. 1폭에서 6폭까지는 현지에서 있었던 주요 행사내용이다. 축하 잔치와 과거시험, 문묘 참배, 군사 훈련, 활쏘기 의식 등이 주제다. 7폭과 8폭은 궁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7폭은 시흥을 지나는 장면이고, 8폭은 노량진에 배다리 설치하고 한강을 건너는 모습이다.
김득신, 이인문 등 화원들이 참여하여 그렸다. 시위 군관과 의장이 수백에 이르고, 1백여 명의 악대, 수백 개의 깃발, 말과 가마, 혜경궁과 시중 나인, 회갑연 행사 인원, 잔치에 참여하는 내외손님이 함께이다. 뿐인가? 수많은 구경꾼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심지어 천막치고 술 파는 광경이며, 음식을 나누는 장면, 어울리고 즐기는 다양한 모습이 빼곡히 담겨 있다.
굽이굽이 늘어선 행렬이 장관이다. 일행이 6천여 명에 달한다니 진행속도도 엄청 느렸을 것이다. 이동수단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지난한 여정이었으리라. 행사 참여자뿐이 아니다. 그리는 사람은 어땠을까? 드론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특별한 기록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생동감을 더한다. 물론 그림에는 특정 시점이 상정되어 있다. 화면 중상을 보면 행렬이 멈추어있음을 알 수 있다. 가마주위로 포장이 처져있다. 혜경궁이 다반을 들며 휴식하는 순간이다. 옆에는 수라 마차며 음식 준비하는 막차가 있다. 가림막 안에 나인이 늘어서 있고 밖에는 장교들이 시위하고 있다. 어머니가 행차 주인공이다 보니 중심에 위치하고 강조되는 것은 당연하다. 효심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혜경궁 위상을 높여 정통성 강화를 도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김득신 외, '화성능행도' 제7폭 '환어행렬도' 1795년경, 비단에 채색, 156.5×65.3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또 다른 긍정적 측면이 있다. 지방관 및 백성과 만남의 장으로 삼아 민심파악과 민원 해결 기회로 삼았다. 백성의 호응과 생생한 현장 사정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정치력을 평가했다. 홍보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행사 장면을 여러 폭 제작하여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처음이라 한다.
과거의 리더는 위업과 위용을 과시하려 했다. 억압해서 얻어지는 부귀영화는 허상이다. 군림하는 것은 그 수명 자체가 길지 못하다. 대선을 앞두고 자천타천 수십 명이 인구에 회자 된다. 누가 더 시대정신, 시대변화를 감지하고 있는지 알아보면 좋지 않을까? 누가 더 사언행일치에 힘쓰는지 따져 볼 일이다. 다시 호세 무히카의 말이다. "국가원수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다." 누가 국민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하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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