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지도 눕지도 못하고 다리를 구부린 상태로 앉은뱅이가 되어 있는 어머니.
병원에서 CT를 찍는 사이 나는 알았다. 혼자 사는 어머니가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다 그만 넘어졌다는 사실을. 통증을 느꼈지만, 곧 괜찮아질 거라고만 생각하였다는 어머니의 말을 댕강 자르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넘어졌으면 넘어졌다고 말을 해야지."
의사는 건조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오른쪽 고관절이 골절되어 큰 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고. 한밤중에 구급차는 어머니와 나를 싣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머니의 두 손을 잡는 것뿐이었다. 새벽에 도착한 병원의 불빛은 시리도록 밝았다.
응급실에서 이것저것 검사하는 사이 어머니는 그만 옷에 오줌을 쌌다. 기저귀를 미리 준비하지 않은 내 불찰을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를 또 질렀다. "말을 해야지."
속옷을 갈아입혀드리면서 어머니가 목욕탕에 가서도 딸에게 애써 감추던 곳을 보고야 말았다. 다섯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했던 여인의 꽃, 이제는 꽃잎의 흔적마저도 없다. 여전히 부끄러운 듯 오그리는 몸을 억지로 펼치는 내 손을 뿌리치는 어머니. 물수건으로 닦고 말리는 그 짧은 순간이 어쩌면 참으로 긴 치욕의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치자 얼른 옷을 입혀드렸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이자 고개를 돌리는 어머니. 한참이나 그 자세로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했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한 시름 놓았다. 하지만 나이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섬망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옆 침대에 누운 환자의 혈액 투석을 보고는 왜 내 피를 뽑아 저 할망구한테 주느냐며 구시렁거렸다. 심지어 멍든 링거 자국을 가리키며 간호사가 꼬집었다고까지 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 항생제 부작용이었을까. 설사와의 전쟁은 끝날 줄 몰랐다. 설사를 하루에 열다섯 번 한 적도 있어 금식도 해보고 약도 달리 처방해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어머니는 억지로라도 두 눈 질끈 감고 음식물과 약을 넘겼지만, 몸이 이를 거부했다. 그나마 한 모금의 물은 겨우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다. 몸이 왜 반기를 들었는지 의학적으로 그 원인을 들여다보고자 담당의사가 정형외과에서 소화기내과로 바뀌었다. 고관절 수술 후의 재활치료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멍한 상태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설 연휴가 시작되고 시댁에서 일찍 올라왔다. 병실에 갔더니 어머니는 파사삭 부서질 듯 메마른 낙엽이 되어 침대 위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반듯하게 누워 꼼짝도 안 했다. 설사도 멈추지 않아 6다른 환자와 간병인들이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처음 입원했을 때 수간호사님이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나이 드신 환자분에게는 수시로 등 밑으로 손을 넣어 마사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반듯하게 있는 어머니를 옆으로 돌렸더니 냄새가 진동했다. 설사가 아니다. 옷을 들추었더니 이미 엉덩이 꼬리뼈에 욕창이 진행 중이다.
고관절이 골절되어 입원한 어머니에게 설사와 욕창은 치명적이다. 걷지 못해도 좋으니 살아서 나갈 수 있게만 해달라며 두 손 모았다. 인공고관절 수술 후 열흘이면 일어설 수 있고 보름이면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은 곤두박질친 지 벌써 한 달 보름이 지났다. 욕창이 생겼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은 완쾌가 어려울 테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굳히라 했다. 하지만 듣기가 싫었다. 팔순이 넘어 사신만큼 여한이 없다고는 하였지만, 이 세상 오직 한 분 '엄마'하고 부르면 '오냐' 하실 어머니를 나는 간절히 원했다.
어머니를 보듬어 안았다. 퍼덕일 날개조차 찢긴 새처럼 내 가슴에 겨우 한 줌으로 앉았다. 병실에 누워계시는 어머니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완쾌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기도가 어머니의 명줄을 잡아주길 간절히 바랐다. 일상은 정지되었고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내 마음과 어머니의 몸이 일치되는 순간이 드디어 왔다. 설사가 멎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내가 탯줄로 이어진 한 몸이었던 그때처럼 우리는 다시 통했음이 분명하다. 금식 중에 링거만 맞아도 설사를 하던 어머니가 한나절을 지나 하루를 버티면서 침대 머리맡에 놓인 기저귀가 그대로 있었다. 배가 고프다고 먹을 것을 찾기도 했다. 밥을 드시자 멍해졌던 눈빛에도 생기가 돌고 병실을 드나드는 막내딸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욕창도 깊지 않아 새살이 돋는 게 수월했다.
퇴원하던 날에는 날씨도 맑았다. 시리도록 차가웠던 병원의 불빛 대신에 따스한 햇볕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나섰다. 비록 워커라는 보조 용구에 기대었지만, 조만간 혼자서도 잘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하늘은 푸르렀다. 재활치료에 열정적이었고 욕창도 거의 다 나을 무렵 혼자서 걷기에 성공하였다. 그 후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는 걸음이 다소 절쑥거려도 세상 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머니가 마른기침을 자주 하였다. 방 안이 건조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여전히 괜찮다고만 하였다. 어디가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고. 어머니가 말을 해야 알지 나는 모른다고. 꼭 말을 해야 알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나 자신이 부끄러운 줄 깨닫지 못하고 되레 핏대 올리며 다그쳤다. 내 호통에도 오직 먼산바라기를 하며 아쉬운 이별에 잠기던 어머니.
"엄마, 들어가, 또 올께."
아파트 주차장이다. 딸이 훌쩍 가고 나면 또 혼자 남게 되는 어머니. 딸의 모습을 꼭꼭 눌러 담으려는 듯 두 눈이 파르르 떨리고 연신 깜박거린다.
"어여 어여 가기나 혀, 찬찬히 가, 빨리빨리 갈라 하지 말고…."
친정엄마도 나도 한사코 바깥쪽으로만 내젓는 손사래 질로 열중이다. 누가 더 오래 하나 시합이라도 하듯. 언제나 내가 진다. 발길을 돌리듯 브레이크 위에 놓았던 발을 뗀다.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구부정한 어머니 모습이 점점 작아지다가 소멸한다. 순간 나는 멈칫한다. 진정 소멸의 그 날이 올까 봐.
백송자/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