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
그러나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시간의 대칭적 창조로 태어나고 죽는 것 사이의 삶을 역궤적으로 그린 F.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의 소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생각나는 것은 이제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음에도 코로나 종식을 기약할 수 없어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녹록지 않은 현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6월 초 이근배 시인 등단 60주년 기념 한국 옛 벼루 명품 소장전 '해와 달이 부르는 벼루의 용비어천가' 전이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는 중앙 일간지 기사를 보았지요. 그러나 우물쭈물하다가 전시회장을 가보지 못하던 차 대전문학관의 '2021년 제1회 문학 콘서트-시로 해가 뜨고 시로 달이 지는 나라' 기획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선생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대전역으로 배웅을 나갔습니다.
이근배 시인(1940~ )은 천재 시인입니다. 1961년 경향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당선, 이듬해 동아일보 시조, 조선일보 동시 신춘문예 당선,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 신춘문예 6관왕은 한국문단사에 전설로 남아있지요.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제39대)을 2019년부터 맡고 계시는데 예술원 회장은 대한민국의 문화예술 대통령입니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꼿꼿하신 시인의 성정은 아마 유학자이셨던 조부님과 독립운동가였던 선친의 아픈 가족사가 문학적 사유로 관통하고 있음인지도 모르지만 어린 시절 조부께서 구독하시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자주 접하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지요. 이어 서라벌예대에 진학하면서 김동리, 서정주 선생의 지도로 소설과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공초 오상순에게 사천(沙泉)이란 호를 받은 시인은 우리 민족은 누구나 시를 쓰는 DNA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문단과 충청 출신인 정훈, 박용래, 한성기, 임강빈, 김성동 작가들과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시인은 자신의 문학적 성취에는 아직도 변변치 못하다며 손사래 치는 겸손을 보이시는 것은 어쩌면 그의 시 「자화상」에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는 비례물시(非禮勿視) 비례물청(非禮勿聽)'과 율곡의 격몽요결이 몸에 밴 까닭이겠지요.
나의 본적은 충남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 209번지이다/ 태어나서 오늘까지 한 번도 옮긴 적 없다/ ……/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라 찾는 일 하겠다고/ 감옥을 드나들더니 광복이 되어서도/ 집에는 못 들어오는 아버지/ ……/ 저놈은 즈이 애비를 꼭 닮았어!/ ……/ 칭찬보다 오히려 고마운 꾸중을/ 끝내 따르지 못하고 나는 오늘도/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맞는다.
자화상의 낭송은 계속되었고 시인의 음성은 분명 떨고 있었으나 타고난 기억력에 모두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주는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학관을 나서니 이게 웬일입니까 '스토로베리문(Strawberry moon)'이 떠 있습니다. 핑크빛 영롱한 이달은 인디언들의 딸기 수확 철인 6월에 뜨는 보름달로 소원을 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오늘은 저 달이 시로 떠오릅니다. /권득용 전 대전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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