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출 전 동문회 사무국장 겸 학보사 기자
1971년 통합때 두 캠퍼스 정관에 반영 요구
1980년 완전한 분리독립 때도 학생들 지지
"학생들과 지역사회는 줄곧 두 대학에 대등한 통합과 운영을 요구했고, 지켜지지 않을 때 과감히 일어났지"
1969년 대전대학 국문과에 입학한 김기출 씨는 교내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숭실대와의 통합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재학생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과 통합을 인지한 시점은 1970년 2학기였고, 학생들도 알고 있어야 한다며 어떤 교수께서 이사회에서 논의된 사항을 알려준 덕분이다. 앞서 1968년 중도일보가 학장 인터뷰를 통해 일부 내용을 보도해 지역사회와 동문, 학생들의 적극적인 반대를 예상해 통합의 진행을 극비로 진행한 면도 있었다. 당시 학생들의 발표문을 보면 두 학교에 통합에는 원칙적으로 찬성하면서 대등한 관계에서 통합을 요구했다. 그래서 통합 후 새로운 교명을 어떻게 짓느냐가 중요했다.
대전 오정골은 1971년에 한 차례 더 학생들의 함성으로 출렁였다. 재단 이사회가 대전대학의 과수원 일부를 매각한다는 소문이 났고 제3의 부지에 통합캠퍼스를 조성한다는 풍문은 지역 대학을 없애려는 숨은 의도로 풀이됐기 때문이다.
김 씨는 "그동안 대등한 통합에 대체로 찬성했으나 이때부터 최초의 분리환원 운동이 시작됐고, 지역사회에 대단한 성원을 받았다"라며 "지역에 유일한 4년제 사립대학이 꼭 유지돼야 한다는 지역 여론과 학생들의 결의가 한 덩어리처럼 큰 힘을 냈다"라고 회상했다.
1971년 5월 중도일보에 게재된 대전대환원추진위원회 발표 성명서. |
서울과 대전 두 캠퍼스를 양립하는 내용의 재단 정관이 개정되고 대등한 통합에 필요한 몇 가지 약속이 이뤄지면서 1971년 숭전대 대전캠퍼스 시대가 시작됐다.
군 전역 후 강사로 교단에 서던 김 씨는 1980년 후배 재학생들에게서 터져 나오던 완전한 분리독립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겨울 어느 날 교내 담벼락에 통합 운영에 따른 모순을 고발한 대자보가 붙었고 너무나 적나라한 사실이 학생들에게서 지지를 얻어 해당 학생에 징계를 막을 수 있었다.
김 씨는 "1971년 통합 첫 단추부터 학생과 지역사회는 대등한 관계를 요구해 정관까지 바꿨으나 10여 년 실제 통합운영되면서 대전캠퍼스 서자의 설움을 받았다"라며 "총학생회가 이사회를 설득하고 때로는 서울캠퍼스에 1000여 명의 학생이 진격하듯 찾아가 밤샘 농성할 정도로 분리독립은 절박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때 두 대학뿐만 아니라 재단법인까지도 완전히 분리됐는데, 교명을 대전대학으로 환원하려 했으나 이미 용운동에 같은 이름의 학교가 설립돼 '한남'이라는 새로운 교명을 지었다.
김 씨는 "염원하던 독립을 이룬 것은 모교를 아끼는 학생과 동문, 지역사회의 성원이 있어 가능했다"라며 "이 역시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긴다"라고 밝혔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