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역사의 한남대학교가 1956년 대전대학에서 시작해 1971년 숭실대와 통합한 숭전대학이었던 역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대학의 교명이 바뀌는 것은 기억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두 대학을 통합할 때 학생과 지역사회가 하나로 뭉쳐 대전에 교육자산을 지키고자 했고, 결국 통합 11년 만에 완전한 분리독립을 이루는 밑거름을 이뤘다면 새겨봄 직한 교훈이 된다. 한반도 남쪽의 명문 사립대학이 되고자 스스로 뜻을 세워 숭전의 굴레를 벗은 역사를 돌아본다.
1980년 숭전대에서 대전대학 분리환원을 요구하는 학생들 집회 모습. (사진=한남대학교 제공) |
대전 오정동 대전대학(대전기독학관)이 서울 숭실대학과 통합이전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지역사회에 알려진 것은 1968년 12월 일이었다. 중도일보는 이웅렬 대전상공회의소회장을 앞세워 당시 대전대학 타요한 학장을 단독 인터뷰하고 소문의 진상을 직접 물었다. 대전과 충남에 유일의 4년제 사립대학이며 500명 가까이 재학 중인 고등 교육기관이 사라질 수 있는 문제로 지역사회에 관심이 높았다. 중도일보와 인터뷰에서 타요한 대전대 학장은 "통합 원칙에 합의 연구 중이나 교명과 장소, 재정 등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 있다"라며 "문교부가 학과 증설을 해주지 않고 학생들이 서울로만 가니 서울 이전 필요성이 증대된다"라고 통합에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사실상 대학 학장이 통합이전설을 인정하는 상황이 되면서 자칫 사립대학을 잃을 위기감이 제기됐다. 중도일보는 나흘 후 사설을 통해 "지역사회 바전을 위해 막중한 대가를 치르면서 어떤 기관 하나라도 유치해야 될 형편에 대학을 타지방으로 이전한다는 것은 방관할 수 없는 일"이라며 지역사회에 관심을 촉구했다.
전대에서 대전대학 분리환원을 요구하는 학생들 집회 모습. |
▲'숭실'을 '숭전'으로 바꾸다
학생들이 대학 통합 과정에 지역 교육자산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 것은 1970년 2학기부터다. 그해 5월 타요한 학장은 당시 교무처장을 숭실대에 파견해 두 대학장의 뜻을 따라 통합의 실무를 맡아 추진했고, 그해 9월 두 재단은 통합을 결정했다. 통합 법인의 명칭은 대전기독학원이고 대학의 명칭은 숭실대학교이었다. 대전대학의 교명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었기에 재학생들과 동문은 곧바로 강력히 반발하고 제3의 이름을 다시 붙일 것을 주장했다. 양 대학의 통합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형태가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 결합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학생과 지역사회의 반발은 거셌다.
1971년 대전대학 분리환원을 위한 시민 서명부 모습. |
학생들은 교명을 결정하는 이사회가 열리는 대구에 쫓아가 대전대 전통을 지우는 새 교명에 반대 의사를 전했고, '숭실'로 결정한 후에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같은 분위기를 감지한 통합 신설 학교법인은 같은 해 10월 이사회를 다시 열어 두 교명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 숭전대학으로 교명을 수정했고, 사태를 봉합할 수 있었다. 1971년 1월 문교부로부터 두 재단의 통합과 숭전대학의 설립은 인가됐고, 그해 12월 숭전대에 종합대학 승격이 이뤄졌다. 숭전대 초대 학장에는 김형남, 대전캠퍼스 부학장에는 황희영이 취임하고, 타요한 직전 학장은 신설 학교법인에 이사장을 맡았다.
▲대등한 통합정신을 심다
숭전대가 된 대전 오정골은 1971년 4월 통합에서 분리해 대전대학으로 환원하라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다시금 메아리쳤다. 재학생 500여 명은 대전대학으로 분리 독립할 것을 요구하며 그해 4월 2일부터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과 단식투쟁을 전개했고, 전원 자퇴서까지 제출했다. 전국에 몇 곳 없는 전자공학과를 서울캠퍼스로 옮기려 한 것을 비롯해 '한남대 40년사'에서는 당시 여론을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캠퍼스의 채무를 상환하기 위해 대전캠퍼스의 기금이 유용될 것이며, 학교 일부 과수원 부지마저도 매각하여갈 것이라는 풍문이 학생들을 자극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1971년 4월 중도일보는 "구 대전대학캠퍼스 학생 480명이 전원 자퇴서를 내고 등교를 거부한 극한 상태가 23일째 계속되고 있다"라며 "학생 전원을 잃게 된다면 학교 설립 의의가 상실되는 것이며 분리 도립으로 본래의 지방대학으로서 독자적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지지했다.
지역사회 인사들도 뛰어들어 이웅렬 당시 중도일보 사장이 대전대학분리 환원 추진위원장을 맡아 서울 이사회와 문교부, 청와대를 찾아 대전대학의 분리를 요청했다. 또 대전적십자사를 만든 박외과에 박선규 회장이 대전대학 후원회를 만든 때도 이때다. 급기야 당시 김윤환 충남도지사가 조정자로 나서 1971년 5월 숭전대 이사회와 대전대학 환원추진위원회의 4시간 논쟁 끝에 8개 조정안에 합의를 이뤘다. 대전캠퍼스를 존치하는 내용을 학교법인 정관에 신설하고 이사회에 대전측 인사를 보강하며 대전대학의 재산과 기금은 대전대학을 위해 사용한다는 약속 등이다. 이로써 대전대학은 통합 숭전대학 시대를 개막했다.
▲상하관계 떨치고 분리독립
1979년 10.26 사태 이후 1980년 3월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하고 학원 민주화가 찾아오면서 숭전대 대전캠퍼스에서도 그동안 억눌린 분리독립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총학생회장을 뽑는 선거에서 후보자들은 모두 대전캠퍼스 분리 환원을 공약할 정도였다. 숭전대 대전캠퍼스 후원회와 동문회가 대전캠퍼스의 완전한 분리를 요청하는 민원을 청와대에 제출했다.
1968년 타요한 대전대학 학장을 만나 통합이전설을 인터뷰하는 중도일보 지면과 1971년 보도. |
당시 숭전대는 1971년 두 대학의 대등한 통합이라는 원칙을 사라지고 서울캠퍼스는 본교, 대전캠퍼스는 분교에 억눌려 있었다. 서울 측이 일방적으로 이사를 선임하는 추세가 계속됐고, 서울에 상주하는 총장에 힘입어 서울과 대전은 상하관계가 만들어졌다. 정부의 공문은 서울캠퍼스를 경유해 대전에 도달하며, 대전캠퍼스 부총장에게는 인사와 재정 운영에 대해 집행권을 부여하지 않아 독립행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대전캠퍼스에 총장 직인이 없어 공문서 하나라도 서울에 올라가서 총장의 결재를 얻어야 했다.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학생들은 학교법인에 대전캠퍼스 분리를 공식 요구하고, 교수들도 교수협의회를 통해 여러 차례 결의문으로 힘을 보탰다. 1980년 학생들은 교내에서 밤샘 농성을 벌이며, 그해 4월 25일부터는 서울캠퍼스로 진출해 재학생 1000여 명이 분리독립 목소리를 전했다. '한남대 40년사'에 따르면 이때 도지사와 중앙정보부실장, 지방법원장, 교육감, 도경찰국장 등 지역 인사들로 구성된 지역 대책협의회가 숭전대학교 사태에 우려와 관심을 표명했다.
사실상 두 대학의 통합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한 법인 이사회는 학교를 완전 독립 경영하되 재단은 하나로 유지하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문교부는 재단까지 완전히 분리가 되어야만 승인할 수 있다는 원칙이었다. 재학생과 지역사회의 설득 끝에 재단에 정관을 수정해 1982년 10월 대전기독학원 창립 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고 교명을 '한남'으로 지어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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