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광진 소장 |
12년이 지난 결과는 어떠할까? 해방 이후 이어져온 학년 중심의 학교운영체계와 학생 생활을 지도하는 담임교사제가 흐트러지면서 학교현장에 혼돈만 가져왔다. 교과교실제를 뒷받침할 여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가운데 시행해 나타난 실패는 고스란히 고교학점제로 이어질 것이다.
2025년부터 모든 고등학교에서 학점제가 전면적으로 시행하면, 올해 초등학교 6학년 학생부터 이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신이 원하는 과목의 강의실을 찾아다니며 수업을 받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그림이 그대로 도입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가장 큰 변화는 교과 선택이다. 국어, 영어, 수학, 통합사회, 통합과학, 한국사 같은 공통과목을 지금과 같이 학생이 공통으로 수강해야 하지만 일반선택과목, 융합선택과목, 진로선택과목이 있어 학생들이 각자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수 경로를 예로 본다면 수학(공통)을 수강하고 다음 학기나 학년에서 일반선택과목으로 '미적분/확률과 통계' 등을 수강하고 다음 단계로 융합 또는 진로선택과목으로 '인공지능수학/심화수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 지금 고등학교는 주당 34시간의 수업단위를 바탕으로 6학기 3년 동안 총 204단위을 이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부는 204단위의 학점을 192학점으로 줄일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되면 주당 시간표에서 2시간 정도가 줄어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학생들은 고정된 교실에서 교사를 기다리지 않는다. 학급시간표가 없고 학생들은 각자의 강의 시간표를 가져야 한다. 학생들은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가 진학의 틀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교과 선택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학생부 종합전형의 대학입시에서 학생들의 과목 선택이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가의 경우, 개인별 성취를 기준으로 하는 평가제가 도입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선택 과목의 경우 절대평가제가 도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10명 정도의 소인수 과목이 개설될 경우 현재의 서열에 따른 상대평가 9등급제를 실행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과목 선택의 폭을 넓혀 다양한 교육을 추구한다는 것이 목적이지만 벌써부터 현장교사들의 걱정이 많다. 현장 학교에서 다양한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제도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교과목을 세분화해 과목 수를 크게 확대해야 한다. 문제는 학기마다 학생들의 수요를 예측하기가 힘들고, 교사 수급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결국, 기간제 고용의 강사 풀이 나타날 것이고 비정규직 교사들이 많이 배출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대학입시다. 선택과목의 경우 성적에 따른 서열형 등급이 아니라 성취 기준에 따른 도달 정도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성적을 입시 자료로 활용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입시에 활용되면 교사들은 성적 부풀리기의 압력에 시달릴 것이다. 학생들은 성적 잘 주는 과목이나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과목으로 몰리면서 평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우려가 크다. 또 수업별로 성취기준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문제 제기로 인해 성적에 대한 불신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들은 학교의 성취도 평가에 대한 불신으로 자신들만의 선별 도구를 강화하려 할 것이다. 논술이나 심층면접 등 대학의 선발권이 강화되는 상황이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학점제의 취지는 온데간데 없고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이 더욱 득세할 수 있다.
이 제도의 도입은 학생의 미래 진로와 관련한 과목에 선택권을 부여하여 고등학교 교육을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 사회는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누구도 그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사회는 평생 여러 직업을 가져야 하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새롭게 갖출 수 있도록 교육도 평생교육 시스템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등학교에서 과목 선택권을 부여하여 학생의 미래 진로를 대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다.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교육이 필요하다. 거기에 문화, 예술, 체육활동으로 감성과 건강을 키워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그러한 교육도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미래 진로를 대비하는 학점제는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학교 현장에 새로운 혼돈만 가져올 것이다.
왜 그동안 교육부가 추진하는 핵심 교육정책은 실패만 거듭하는가? 현장교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지 않기 때문이고, 현재의 대학서열 체제에서는 어떤 교육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사 이런 식이라면 교육부가 없어지는 것이 도리어 교육을 살리는 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성광진 대전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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