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뒤에 영욕이 뒤바뀌는 사람도 있다. 기록 방식도 여러 가지다. 글이나 그림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여타 예술 분야에 남기도 한다. 동상 등 기념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좀 특별하지만, 흔적 어린 장소가 추억되기도 한다.
'화개현구장도', 이징 작, 1643년, 비단에 채색, 89 × 56㎝, 보물 제1046호, 중앙박물관. |
화계현은 현재의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일대를 지칭하는 옛 고을 명이다. 화개천이 섬진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화개장터가 있다. 1988년 김한길이 쓴 가사에 조영남이 곡을 붙여 부른 '화개장터'로 명소가 된 그곳이다. 화개장터 노래비에는 조영남 작사·작곡·노래로 되어있다. 1997년에 장터가 복원되어 동서화합의 상징으로 관광화되어있다. 원래는 동서 사람이 모여 농산물과 해산물을 교환하던 오일장이라 한다. 부근에 정여창의 별장이 있었던 모양이다. 구장은 별장을 의미한다.
정여창(鄭汝昌, 1450 ~ 1504, 성리학자)은 함양(咸陽) 덕곡리(德谷里) 개평촌(介坪村)에서 태어났다.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였다. 1483년 늦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49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과거시험과는 달리 학문과 효성이 깊어 귀한 자리에 수차례 천거되기도 한다. 지리산 자락 악양동(岳陽洞) 부근 섬진(蟾津) 나루 근처에 집 짓고 대와 매화를 심으며, 학문에 매진하고자 하였다. 성종(成宗)의 간곡한 권유로 출사하여 예문관검열, 시강원 설서, 안음현감을 지낸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종성(鍾城)으로 유배되어 1504년 서거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되고 그의 저서나 유품도 함께 불살라진다.
무오사화 발단은 사초에 있었지만,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가 폭군 연산을 등에 업고 비판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건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 친모 윤씨 복위문제가 불거져 시작되었으나, 실은 왕과 훈구파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훈구파 재상이 망라하여 제거된다. 이에 훈구파와 사림파가 결속, 반격하여 연산군을 폐위한다.
유학은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추구한다. 개인 수양으로 하늘과 하나 됨을 실천하면 성인이 된다. 성인이 모이면 그가 바로 이상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하다. 먼저 성인이 된 사람이 왕이 되어, 필부를 깨우쳐 성인이 되도록 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道學政治) 등이 그것이다. 천하가 고루 바르면 얼마나 좋으랴! 드러나는 과정과 결과는 전혀 다르다. 여타 철학이나 이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사화로 정여창 저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학문 세계를 알기 어렵다.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의 호 일두(一?)는 한 마리 좀이란 말이다. 얼마나 겸허하고 깊은 성찰인가? 5년여 짧은 기간 향리로서 선정을 베풀고 틈틈이 학문을 가르쳤다. 1568(선조1)년 명나라 사신에게 전한 우리나라 십대유(十代儒)에 포함되었다. 중종 대에 우의정에 추증되기도 한다. 1610(광해군 10)년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과 함께 문묘에 승무(陞?) 되었다. 문묘에 배향된 열여덟 성현(동방 18현) 중 한 사람이다.
화개현구장은 정여창이 한동안 머물며 학문에 매진한 별장이다. 애정 어린 장소가 세파에 훼손되자, 민망하였던 모양이다. 후손들이 그 뜻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그림을 의뢰한다. 신익성에게 뜻을 전하자, 신익성이 이징에게 설명하고 그리게 하였다. 1643년이다. 장소가 명기되어있지만, 실경산수가 아니란 말이다.
그림의 작가 이징은 문인화가 이경윤의 서자다. 산수, 인물, 영모, 묵죽, 화훼 등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났다. 당대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려 1628년 태조어진 개수에 참여하였으며, 여항문인 유희경 요청으로 실경산수 '임장도(林莊圖)'를 그리는 등 일반인의 요청도 많이 따랐나 보다. 17세기 이전 작가로는 가장 많은 유작이 전하나 낙성관지(落成款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제작 내용을 알 수 없다. 감상하는 그림은 제작 시기나 내용을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상태가 좋지 않지만, 천천히 들여다보고 서정적 품격을 느껴보시라.
삶은 일과 덕이 아닐까? 사람이 남겨야 하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공덕이란 생각이다. 이름은 공덕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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