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 鳴(울 명) 梁(들보 량 / 다리 량) 大(클 대) 捷(이길 첩/싸움에 이기다)
출처 : 정유재란(丁酉再亂), 난중일기(亂中日記),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등
비유 : 죽을 각오로 전투에 임해 큰 성과를 얻는 역사적 본보기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戰船)이 있사오니(今臣戰船尙有十二)" …… 이어서 이순신은 "죽을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廢)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써, 이로 말미암아 호서(湖西)를 거쳐 한강(漢江)에 다다를 것이니 신(臣)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
필자는 이 문구를 접할 때마다 전율을 느끼는 감동으로 분발이 북받쳐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하다. 자신감이란 이런 것인가?
당시 칠천량(漆川梁)에서의 처참한 대패(大敗)로 조선수군은 궤멸(潰滅)되다시피 했고, 수군이 거의 수장(水葬)된 상황에서 수군체제는 제대로 된 지휘통제체제와 군의사기(士氣)는 거의 바닥 상태였기에 궤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참담한 소식을 접한 선조는 어쩔 수 없이 도원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고 있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사실 선조는 칠천량 해전 이후 대책이 이순신뿐임을 알았지만 이순신의 복직이 내키지 않았다. 칠천량 패전이 보고된 이후 조정에서는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문제로 떠들썩했지만 결국 적임자는 이순신(李舜臣) 뿐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이 언급되자 대답 없이 그 자리를 나가버렸고, 결국 남아있던 대신들이 복직을 결정했다. 나라가 없어질 상황에서도 선조는 이순신을 경계하고 질투하기를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때 전선(戰船)은 모두 합쳐도 판옥선 13척에 초탐선 32척이 전부다.
이는 명량해전 당시 동원했던 전선만 최소 330척에 이르던 일본군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순신의 복직 이후 도망쳤던 수군 병력들이 다시 결집하면서 조선 수군이 빠르게 복원되었고, 점차 진영이 갖추어지는 등 조선의 수군은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한심했던 조정에서는 배도 없는데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는 의견까지 나왔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육전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 드디어 일본 수군은 9월이 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9월 7일에 어린진(魚鱗陳)으로 들어와서 벽파진(碧波津)의 이순신과 대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일본군 수뇌부는 이미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조롱하듯 처음에는 배 13척만 보내서 벽파진에 주둔한 조선 수군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다.
14일에는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는데, 일본군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어린진에 입항했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단숨에 이순신의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대담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고 했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정유재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인 9월 15일, 전투가 임박했음을 안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사호집(沙湖集)에 의하면 이순신은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는데 왜군의 조총 탄환은 이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冬瓜/겨울수박이라고도 함)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했고, 적은 수(數)의 함선으로 '울돌목'을 등지고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순신은 진영을 '울돌목' 너머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千)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일단 이순신의 난중일기 초판본에는 전투 초반에 적선 133척이 아군을 에워쌌다고 되어 있어 최소한 전체 수와는 별개로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함선은 133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과 명량해전 이후 전투보고서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에는 명량에 돌입한 배들이 관선, 즉 '세키부네'로 구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또한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 결과와 이충무공전서의 기본이 되는 충무공 가승의 기록에서도 일본의 전선 수는 330여 척, 직접 참전한 전선이 133척으로 나온다.
이순신이 각오한 12척의 전선(戰船)! 당시 조선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장군인 본인조차도 이 전투에서 패해 몰살당할 것을 각오하고 죽음으로써 전투에 나섰던 것이다
유월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다. 가끔 비구름이 지나며 소나기의 심술도 간간이 이어진다.
호국(護國)의 달을 상기하는 두 번째 시간이다. '고사성어' 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선조들이 목숨 걸고 지킨 조국 대한민국을 온 국민이 이순신 같은 죽을 각오의 심정으로 사랑하고 지켜야 되지 않겠는가?
장상현 / 인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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