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에 나섰다가 무척 힘들었던 경우도 있다. 몸 상태가 불안한 측면이 있겠으나 기후 탓도 있는 듯하다. 지쳐 계곡으로 내려간다. 신발 끈 풀고 양말을 벗는다. 계곡물에 발 담그고 거친 바위에 앉는다. 얼마 되지 않아 발이 시려온다. 자갈밭에 몸을 눕히고 다리는 바위에 얹는다. 나뭇잎 사이로 흔들리는 조각 하늘이 눈부시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부차(夫差)와 구천(句踐)이 나타나기도 하고 좌망(坐忘)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온몸 드러내지 않고 더위를 식히는 최고의 피서법 아닐까? 옛사람도 즐겨 사용했으며, 탁족(濯足)이라 했다. 피로가 잽싸게 달아난다. 몸 전체가 시원해진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과 맑아지는 정신은 덤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를 일깨우고 구도와 수신의 길로 안내한다.
겸손과 존중, 사랑의 실천으로 다른 사람 발을 씻겨 주는 세족(洗足)을 생각해 본 일이 있다. 탁족은 굴원(屈原, BC343 ~ BC278,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 시인)의 <어부사 漁父辭>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물결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큰 물결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보는 관점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옛그림 인문학'에서 박홍순이 피력한 견해이다. "창랑의 물은 세상을 상징한다. 물이 맑다는 말은 세상에 도가 통할 수 있는 상태다. 갓끈을 씻는다는 말은 세상으로 나아가 벼슬을 맡아 뜻을 펼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물이 흐리다는 말은 세상이 혼란으로 가득해서 도가 통할 수 없는 상태다. 발을 씻는다는 말은 비리나 질시로 가득한 세상에서 나와 초야에 묻혀 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다가 추방당한 굴원의 굴곡진 삶을 반추해 볼 때 이견의 여지가 없다. 구국의 열망과 책임감, 충성심이 충만했으나 하늘도 땅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유배길에 어부가 일러준 말이라고 전한다. ≪맹자≫ <이루 상>에는 어떤 아이가 한 말로 나온다. '그런 차이가 모두 물이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자기가 깨끗하면 어찌 더러운 발이 들어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나, 세상과 섞이지 못하고 구도의 길에 올랐던 그 자신의 생에 대한 진솔한 토로는 아닐까?
이러한 탁족이 중국 북송 무렵부터 화제로 많이 등장한다. '개자원화전 芥子園?傳' 점경인물조(點景人物條)에도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사인물도 소재의 하나로 조선 중기부터 많이 그려진다.
고사탁족도, 이경윤, 비단에 수묵담채, 27.8 × 1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유유자적(悠悠自適), 자연 속에서 술과 탁족을 즐기는 자유롭고 편안한 모습이다. 넓게 가지 드리운 고목 아래 나이 든 사람이 언덕에 앉아 물에 발을 적시고 있다. 저고리 옷자락 풀어헤치고 가슴과 불룩한 배 드러내고 있다. 바지 벗은 속옷 차림인지,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것인지 그림으로는 알기 어렵다. 오른발 등으로 왼 다리 종아리를 문대고 있다. 비비는 모습이 여유롭다. 어찌 시름이 머물 수 있으랴. 동자가 커다란 술병 들고 다가온다. 한껏 취한들 어떠하랴.
역병에 고온다습까지, 이래저래 걱정이 많다. 더구나 삶은 늘 선택의 연속 아닌가? 어려움이 가중된다. 어느 것이 선인지 판단이 어렵지만 적어도 재앙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위의 맹자 문구에 이어지는 말이다. 서경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있다. "하늘이 만드는 재난은 피할 수가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난에는 살 수 없다(天作孼 猶可違 自作孼 不可活)." 너나없이 지혜롭게 대처하여 잘 이겨 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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