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비록 ‘좋은 게 좋다’가 저잣거리의 상식처럼 널리 통용된다 해도, 상식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상식보다 더 정밀한 개념을 만들어내야 하는 학인들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통념이라는 구닥다리 ‘사회적 상상체’(the social imaginary)를 해체하고, 변화하는 지금의 시대에 더욱 합당한 ‘신화’,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하는 데 더욱 유익한 전략으로서의 ‘상상체’를 창조하는 것이 인문 학인의 임무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리 단순하지 않다. ‘좋은 게 좋다’라는 말을 다시금 곰곰 생각해보면서, 이는 특히 우리 사회의 '관계'와 '정의' 사이 딜레마를 보여주는 지점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꽤 오래전 일이다. 당시 특정 분야 채용 여부를 결정하면서 나는 과정의 불합리성을 발견했고, 다소 늦었지만 이를 바로잡을 셈으로 어떤 분을 찾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그분은 불합리성에 상당히 공감하면서도 놀랍게도 자신은 “좋은 게 좋다”면서 이의제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땐 오로지 실망뿐이었다. 저토록 훌륭한 학자께서 어떻게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원칙 없이 공공연히 말씀하신단 말인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에게 원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에게는 '관계'가 원칙이었고, 거절은 그 원칙에 따랐음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그분은 "관계가 좋은 것이 좋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각자 얽히고설킨 "관계"를 고려할 때, 소위 '불의'에 이의제기하면 '관계'를 두루 망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관계에 서툴면 공공연히 "괘씸죄"를 감당해야 하는 불이익도 종종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원칙 자체가 이현령비현령 수시로 들쑥날쑥 해석되는 판에, 가변적 '원칙'과 오랜 세월 쌓아온 '관계'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꽤 딜레마였음이 틀림없다. 그분의 선택은 "관계"였고, 결론인즉슨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친한 사람 편드는 것이 정의인 셈이다. 이에 대한 사회적 판단은 꽤 관대하다. 왜? 우린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학연과 지연 관계로 똘똘 뭉친 경우, 편드는 '관계'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다. 편드는 것은 쉽게 용인될 뿐만 아니라, 편들지 않으면 오히려 친구답지 않다고 여기는 사회다. 이렇게 편드는 사회는 과연 사회발전에 도움이 될까? 진영논리가 판치는 요즘의 정치판을 보면 사회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단언하고 싶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다. 공사 막론하고 사안에 따라 편들 일이 있으면 편드는 것이 맞을 때도 있긴 하다. 친구가 설사 불의한 일을 저질렀을지라도 그 친구에 대한 뭇매에 적극 동참하는 것은 매정하고 심지어 정의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래저래 잔인한 것만큼 불의한 일은 없으니까.
사안은 매번 미묘하게 달라서, 좋은 게 좋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가변적일 수 있는 정의 원칙을 무작정 고수하려는 융통성 없는 원론주의도 아니면서, 제아무리 관계가 정의라 해도 무작정 제 편만 드는 편향성을 피하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친구의 관계를 배신하지 않으면서도 공의로울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딜레마다. 정직한 성찰만이 답이다. /김명주 충남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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