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신용하(?鏞廈, 1937년 12월 14일 ~ 서울대 석좌교수)가 논문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에서 정의한 민족은 이렇다. "민족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이 언어, 지역, 혈연, 문화, 정치, 경제생활, 역사의 공동에 의하여 공고히 결합되고 그 기초 위에서 민족의식이 형성됨으로써 더욱 공고하게 결합된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 공동체다." 그렇다. 민족은 운명 공동체라는 의식, 동질감으로 뭉쳐진 주관적 심리상태와 객관적 종족 요소를 갖는다.
민족은 공동체의 기본 단위이다. 그를 으뜸으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상이 민족주의이다. 공동체의 통일과 독립, 번영과 발전 등을 추구한다.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세계화, 정보화, 다문화가 진전되었다. 다양성 확대로 국가관이나 민족관이 약화 되지나 않을까 염려한다. 흔들리고 있음이 감지되기도 한다. 따라서 건전한 애국심 고양이나 헌법적 가치에 충실하게 하기 위한 교육에 힘쓴다. 국가 유공자에 대한 예우 강화 및 홍보 확대 등도 그러한 가치추구의 하나다.
정체성 상실의 피해와 설움이 얼마나 큰지, 우리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봐왔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는 가정에서 이웃, 이웃에서 국가와 민족으로 확대된다. 사회구성 기초요소이기 때문에 개방적이냐 폐쇄적이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 민족주의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주 시대가 열리지 않는 한 민족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대로 지속되리라.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해가는 과정임은 분명하다.
국가관이나 민족관을 저해하는 요소가 또 있다. 국가이다. 국가와 국민은 상호 선순환 관계에 있다. 국민의 건전한 정신이 건강한 국가를, 좋은 나라가 우수한 국가와 민족을 만든다. 국가가 국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지 못하거나,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사회적 약자를 충분히 배려하지 못한다면 누가 공동선을 추구하고 애국심을 갖으랴.
그림은 사진이 없던 시대 특별한 이미지 기록이며, 학습교재이기도 했다. 변박(卞璞, 생몰미상) 그림 한 폭 감상해 보자. 1760년 개모(改模)한 보물 392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1709년 처음 그려짐)'이다.
비단에 수묵담채. 145㎝×96㎝. 보물 제392호. 육군박물관 소장 |
변박은 원래 동래부 무반이었다. 동래부사였던 조엄(趙?, 1719~1777)은 1763년 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변박을 데리고 가 화사를 맡겼다. 동래성 남문 밖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 비문을 썼다. 본업이 아니었지만, 당대 최고의 화가와 명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보물 391호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도 그의 작품이다. '왜관도(倭館圖)', '묵죽도(墨竹圖)', '유하마도(柳下馬圖)' 등 전하는 작품도 많지 않은데 2점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작품성보다 역사적 가치를 중히 본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다소 경직된 면도 있지만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잘 담겨 있으며, 회화성도 탁월하다.
그림을 보자.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2.12. ~ 1592.5.25.)과 민관의 항전 내용이다. 선조 25년(1592) 음력 4월 13일 일본이 부산포로 침략했다. 이어서 음력 4월 15일 동래성을 공격했다. 사투를 벌였으나 성이 함락되어 송상현이 사로잡혀 처참하게 살해된다. 그림은 별개 장면을 한 폭의 화면에 그렸다. 근경에는 길을 빌리자는 왜장을 향하여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는 팻말을 던지며 항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중앙에는 순절하는 장면이, 우측 중상에는 성의 함락과 왜군이 난입하는 모습, 상단에는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이각(李珏) 등이 도주하는 모습을 그렸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일까? 왜 그렸을까?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인류가 상호존중과 공존공영(共存共榮)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맹목적 자민족 중심주의는 분명 부정적 측면이 있으나 소중한 개체가 모여 전체가 됨도 잊어서는 안 된다. 긍지와 자부심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