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도솔산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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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도솔산의 품

백송자

  • 승인 2021-06-03 16:25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늙수그레한 밤나무를 제일 먼저 만난다. 그 뒤로 졸참나무, 싸리나무, 산초나무 등이 눈인사를 건네 온다. 나무들 사이사이에는 풀꽃들이 낮은 자세로 피고 진다. 오랜 세월, 산은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며 마중하고 배웅하기를 반복한다.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를 반기며 어루만지는 산이 도솔산이다.

산허리를 돌아 서편에 있는 수변 길이다. 세속의 혼탁함을 씻어내고 여흘여흘 흐르는 물은 깊지도 얕지도 않다. 갑천에 자맥질하는 물고기들이 물살을 가른다. 강태공들의 무심함이 지나는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낚싯줄에 걸려드는 물고기의 등을 한 번 두드려보고는 다시 방생하는 그들의 손길에 강물도 잠시 침묵하는 듯 고요하다. 물고기가 아닌 시간을 낚는 빈 가방이 묵직해 보인다. 이곳에 오면 늘 자연과 속살이 맞대어 온몸을 훑는 신선한 물결이 여울져온다.

강을 바라보는 곳에 벤치가 나란히 두 개 있다. 비어있다. 다실에서 다기로 차를 준비하는 정성으로 보온병의 물을 따른다. 숲과 강을 벗이라 생각하고 잔을 손에 드니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나보다 먼저 차향을 맛본다. 차향을 머금은 바람은 잠시 내 앞에 머물다 곧 강 너머 너른 들판으로 자리를 옮긴다. 차를 마신다. 한 모금의 차로도 내 몸이 열기로 가득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본다. 눈을 감는다. 강변에 피어났다가 부서진 갈대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나며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산악자전거를 몰고 온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는 나를 본 그들은 자전거를 길 한쪽에다 세워두고 내 자리를 탐한 것이 미안한 듯 내게 등을 보인다. 사람이 만든 공간이 아닌 자연이 주는 자리는 누구의 독점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다. 그 자리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가끔은 나뭇잎들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잠시 내려와 숙면에 드는 때도 있다. 나는 내 옷에 묻은 도솔산의 가을 기운은 자리에 남겨두고 삶의 티끌만 툭툭 털어내며 허리를 곧추세운다. 젊은이들의 소리가 그림자처럼 내 뒤를 바짝 달라붙는다. 굽은 길을 돌자 더는 따라오지 않는다.



이제 가파른 산길이다. 평탄한 길과 내리막길만 거의 걷다가 처음으로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우리네 삶도 그렇다. 늘 평탄한 길만 펼쳐진 것도 아니며 또 가파르고 비탈진 길만 이어지는 것도 아닌 게 인생이다. 나는 지금 어느 곳 어느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남편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가는 길에는 다소 돌멩이도 있고 움푹 파인 길도 있지만, 힘을 합쳐 오르내리는 길을 걷다 보니 땀을 닦을 여유가 생긴다. 오르막길을 오를수록 하늘이 머리 가까이 닿는다.

큰 나무는 어린나무 주변으로 수북이 낙엽을 쌓는다. 겨우내 가녀린 몸을 지탱할 따뜻한 자양분이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을 생각하게 한다. 잎사귀는 뿌리에서 생긴 것이니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인생도 거름으로 돌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거름이 되기 위한 삶, 거름이 되는 삶을 산에서 배운다. 산은 내 인생 학교다. 산에 드는 사람은 글자가 전해주는 명언이 아닌 울림으로 배우며 느낀다. 산에 있는 것들은 스스로 성장을 위해 빛과 이산화탄소를 공유한다.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는 그 미덕. 내리막길보다는 오르막길에서 마음으로 더 생각한다.

새 몇 마리가 상수리나무와 소나무 사이를 포르르 날아간다. 겨울이 오기 전에 먹이를 찾아두느라 날갯짓이 분주하다. 청설모의 나무 타기도 요란하다. 어린아이의 밝은 소리가 통통 튀며 위에서 굴러온다. 정상인 도솔봉이 바로 눈앞이다. 도솔봉은 해발 207미터다. 사방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숲의 울림이 목을 지나 가슴까지 꽉 들어찬다. 웅기중기 둘러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산은 흔흔히 웃는 사람들을 끌어안는다. 품에 담쏙 안긴 사람들은 저마다 휙휙, 휘파람을 불며 고단함을 날려 보낸다.

봄여름 가을 겨울, 맑은 공기며 깊은 나무 냄새며 풀꽃 향기로 고른 숨을 쉬며 나는 산다. 그 숨을 쉬는 날에는 남에게 부아를 내지를 일도 내게 부아가 치밀 일도 없다. 마음만 먹으면 한달음에 도솔산의 품에 들 수 있고, 그 품은 언제나 어머니처럼 넉넉하다. 산은 공평하여 모두를 품에 안고 다독인다. 산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뿐만 아니라 생명 없는 물이며 흙이며 바위들에도 기운을 실어준다. 도솔산의 품에 드는 이, 엄마의 품에 잠든 아가의 마음으로 돌아가 세상을 맑고 순하게 바라보리라.

팔을 뻗어 나뭇가지들을 살짝 건드려 본다. 빈 나무로 겨울을 준비하느라 움츠려 있다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봄을 미리 잉태하고 묵직하다. 가을이 봄에 자리를 내어주듯 인생의 가을 길에 접어든 나도 욕심의 보따리를 내려놓는다. 산드러운 바람을 가슴으로 받으며 내려오는 길, 만나는 사람마다 덥석 그의 손을 마음으로 잡는다. 내 마음에도 봄이 꿈틀거린다.

백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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